한국인 납치 탈레반의 실체는 무엇인가?

탈레반을 알기 위해서는 탈레반의 탄생과 몰락, 흥망성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사회주의 정권을 보호하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1978년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간 인민민주당은 모함마드 다우드(Mohmmad Daoud) 정권의 탄압에 맞서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며 다우드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신정권의 급진 정책은 무슬림들의 저항에 부딪쳐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1979년 소련은 개입을 선언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국민들은 즉각 ‘성전’을 선포하고 대소항쟁에 들어갔다. 1985년에 이르러 이슬람반군들은 연합전선을 형성, 이슬람동맹저항운동인 ‘무자헤딘’을 결성하였으며 소련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약 10년 동안 이어진 거센 저항에 소련은 결국 굴복하였으며 1989년, 마침내 철수를 결정하였다.

소련이 철수한 1992년, 부르하누닌 랍바니(Burhanuddin Rabbani)는 소련이 남기고 간 나지불라 정권을 전복하는데 성공하여 권력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결성된 탈레반의 급성장으로 랍바니 정권도 1996년 와해되고 만다. 수도 카불에 입성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학생조직 탈레반은 나지불라 전 대통령을 끌어내 공개처형하는 등 과격한 선동과 행동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결집하였다.

북부동맹 미영 연합군과 탈레반 축출

한편 정권을 빼앗긴 랍바니는 1997년, 서로 다른 민족 종교에 기반을 둔 7개 정파를 연합해 반탈레반 저항조직인 ‘북부동맹’을 결성한다. 북부동맹은 러시아와 이란의 원조 속에서 탈레반을 공격하였으나 상황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으며 탈레반에 계속 밀린 가운데 아프간 영토의 10% 미만을 통제하는 데 그쳤다.

그후 붕괴직전까지도 내몰렸다가 이들이 극적으로 다시 기사회생한 것은, 9.11 테러 사태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북부동맹은 미국과 영국 등 동맹국들의 합동 작전 속에서 15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탈레반을 공격하였으며 약 한 달 만에 북부의 헤라트, 북동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 동부의 잘랄라바드, 중부의 수도 카불 등을 잇달아 점령하였다.

마침내 12월 6일, 탈레반 정권은 탈레반 전사들에 대한 사면과 최고지도자 물라 모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ad Omar)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최후 거점 칸다하르를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슬람 원리주의 신정 국가를 표방한 탈레반은 그 폭정으로 더욱 악명높다.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근거해 지구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인터넷은 물론 TV 시청도 못하게 하였다. 서양 음악과 영화 같은 것은 악마적인 것이라며 금지시켰다. 사람들은 반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진촬영에도 응해서는 안 된다.

탈레반 이슬람 율법 원리주의 극악 통치

남자는 머리에 터번을 둘러야 하고 수염을 반드시 길러야 하며 특히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눈동자만 빼고는 검은 ‘브르콰스’로 온통 감싼 채 외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여자는 교육을 받아서도 안 되고 직업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흥청거리며 노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설날도 폐지했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어서도 안 된다.

‘종교경찰’은 이러한 이상향의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해 24시간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2000년 3월에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버미얀 석불을 산산조각 내버려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충격을 받은 바 있는 미국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탈레반 병참을 지원하였다. 자신들을 ‘탈렙’(‘학생’ 혹은 ‘제자’의 의미)이라고 부르고 ‘이슬람의 충직한 제자’가 되겠다는 뜻을 가진 ‘탈레반’은 소련군 침공 시 전쟁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난 난민 출신 학생으로 구성된 무장학생조직이다.

이들은 내전이 극에 달한 시점인 1994년 파키스탄에서 조직됐다. 탈레반 정권의 기반은 종교상으로는 수니 이슬람이며 종족으로는 파쉬툰족으로 구성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거, 지구상에 가장 순결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목표를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에 근거한 급진적 이슬람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탈레반의 통제는 폭정으로 이어졌으며 그들의 반인권성을 우려한 미국과도 점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탈레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세력 확산

특히 탈레반이 반미 테러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그에게 훈련기지와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998년 8월에는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가 발생, 미국은 이를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알 카에다 훈련기지 및 지도자 빈 라덴의 은신처를 향해 75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태의 충격 속에서 그 주모자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게 다시한번 그를 내 놓을 것을 경고하였다.

탈레반 정권은 이를 부인, 거부하였으며 2001년 10월 8일 미국은 빈 라덴 생포의 명분과 탈레반 정권 전복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하였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전쟁의 목표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의 제거, 탈레반 정권의 전복을 넘어서 전세계 테러 행위의 근절과 조직의 붕괴라고 주장했다.

12월 6일, 궁지로 몰린 탈레반 정권은 항복을 선언하였지만 빈 라덴의 생포는 실패로 돌아갔다. 22일에는 탈레반이 물러간 아프가니스탄을 이끌 과도정부가 출범하였다.

온건파 파쉬툰족 출신인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 내각은 아프간 정파회의의 최종합의에 따라 총리 1명, 부총리 5명, 장관 24명으로 구성된 30명의 각료들로 구성되었다.

탈레반은 항복했지만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산악지대로 숨어든 탈레반은 기회를 노리며 군대와 병참을 보강하고 군사 훈련을 지속하였다.

또한 간헐적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등 후방을 교란하는 게릴라전과 테러를 병행해 왔다. 전투전은 물론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가 하면 도로에 폭탄을 매설해 재건사업까지 방해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공세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외국인을 납치해 살해하는 테러까지 가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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