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다시 도움 요청하면 한국갈 것”

“한국이 다시 도움을 요청한다면 우리는 한국으로 갈 겁니다.”

57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군 조종사로 머스탱을 몰고 북녘 하늘을 누볐던 존.E 렐로(83.예비역 준장)씨는 22일 수도 프리토리아 서쪽 발할라 지역의 자택에서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맞는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지난 50년 간 이룬 성취를 찬탄해 마지 않는다”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인이 성취한 것에 버금가는 업적을 이룬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만족해 했다.

1952년 9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참전했던 렐로씨는 지난해 6월까지 8년간 국제한국전참전향군연맹(IFKWA) 회장을 맡아 21개국의 참전 용사들의 유대 강화와 친목 도모에 헌신해 왔다.

또 올해 1월에는 고령에 따른 거동 불편을 이유로 남아공 한국전참전협회장 자리도 후배에게 물려줬다. 그러나 그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케이프타운에 거주하는 후임 회장을 대신해 25일 한국대사관이 주최하는 참전용사 오찬 행사를 일일이 챙기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렐로씨는 “한국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쓰레기로 가득찼고 도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한강에는 나무다리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면서 “식량도 없고 집도 없어 사람들이 궁핍한 삶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금 한강에는 23개의 교량이 있고 지하철도 다니고 있다. 또 강변에는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됐다”면서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가 어떻게 해서 단시일에 복구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놀라워 했다.

그는 2002년 방한해 포항제철 등을 둘러본 기억을 되살리며 “강판을 감는 작업을 하는데 한 사람이 컴퓨터로 모든 공정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었다”면서 “그것은 내게 있어 최고의 효율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세계 최고 중의 하나”라면서 “내 차는 기아차이고, 아내는 현대차를 타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작년에는 서울에서 부산 유엔묘지를 가는데 고속철도를 이용해 불과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면서 “정말 대단했다”고 칭찬 릴레이를 이어갔다.

렐로씨는 “한국인들이 이뤄놓은 업적들을 내가 얼마나 경탄해 마지않는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한국은 범죄율이 매우 낮고 보건체계도 좋고 의사들도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산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남북 관계에도 언급, “한국은 현재 다시 북한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도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미군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을 격퇴할 수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남아공은 한국전이 발발하자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 호주에 이어 세번째로 조종사와 지상요원을 포함, 연인원 801명의 공군 전투비행대대와 34명의 육군 병력을 파병했다.

`날으는 치타'(Flying Cheetahs)라는 별칭을 지닌 남아공 공군 제2 비행대대는 조종사가 75회 출격을 기록하면 귀국시키고 다른 조종사로 대체해 가면서 적 화력 및 시설물 파괴, 유엔 지상군 지원, 정찰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대부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지닌 남아공 조종사들은 한국전에서 탱크 44대와 차량 900여대를 파괴하고 후방 보급선을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종사 34명 등 총 36명이 전사.실종되는 희생을 치렀으며, 8명은 포로로 붙잡혔다가 휴전과 함께 풀려났다.

이들 참전 용사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에 나가 살거나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남아공에는 현재 90여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