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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자장(子張)편에 “자하가 말하길,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子夏曰 小人之過也 必文)”라는 구절이 있다.
필자는 지난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북한인권국제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통일부, 외교통상부 등의 정부 인사들과 이 대회 자체를 반대하는 천주교인권위원회, 민변, 인권운동사랑방, 열우당 의원 등의 주장을 보고 바로 논어의 이 구절이 생각났다.
때로는 6자회담의 성공을 핑계로, 때로는 북한인권에 대한 거론이 정치적 음모이며 전쟁선동이라는 궤변으로, 때로는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인권을 거론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들이 동원됐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연구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자신들의 노력의 80%는 김정일파시즘에 아부하기 위해 북한인민의 처참한 인권상황이 언급되는 것 자체를 막기 위해 갖은 술책을 동원하는 한국의 좌파정권과의 소모적 논쟁에 쏟아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자유민주주의는 형식적 측면으로서 다수결 원칙, 내용적 측면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쟁적 대화가 필요하다. 다수결 원칙 없이는 의사결정의 원칙이 없어지고, 설득을 위한 논쟁적 대화 없이는 우중민주주의, 포퓰리즘, 파시즘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논쟁적 대화도 논쟁 당사자들 간에 몇 가지 기본적인 세계관, 가치관들이 일치할 때나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화는 항상 평행 혹은 파행으로 흐르고, 이 궤변과 다름없는 주장들을 논파하기 위해 일일이 쫓아다녀야 되는 피로를 면할 수 없다. 바로 한국의 좌파정권, 좌파 지식인들이 북한인권에 대한 주장들이 이런 경우이다.
이웃사랑의 실천을 그 지향점으로 하는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자유민주주의를 변호한다는 민변이, 인권운동을 한다는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시민단체의 입으로부터 가장 비종교적, 가장 비민주적, 가장 반인권적 태도를 지켜 보아야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인종차별, 흑인의 ‘자주적 권리’ 보장?
약 20년 전에 뮌헨의 시립도서관에서 본 한 잡지가 생각났다. 그것은 세계 모든 나라의 철학학술지를 모아 둔 방에서였다. 필자는 남아프리카에서 발행된 잡지 하나를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인종차별을 철학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때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Apartheid)이 극에 달한 시기였고, 이에 대한 전 세계의 지탄과 압력도 거세질 때였다.
필자는 도대체 이런 인종차별정책을 지지하는 철학자의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철학적 이론이, 논리의 어떤 곡예가 이런 반인륜적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인가?
인종차별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필자의 생각은, 그러나 논리의 공중곡예가 얼마나 간단한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아공의 몇몇 철학자들도 인종간의 ‘차별’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택한 전략은 아예 ‘인종차별이 없다’는 주장이었고 이를 위해 인종간의 ‘분리’는 백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흑인의 ‘자주적 권리’를 보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리’란 쌍무적, 대칭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당시 남아공의 종교계에도 널리 퍼진 생각이었다. 이런 인종분리는 피부색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는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며, 당시 흑인 대다수에 대한 극심한 폭력행사를 감안할 때, 말 그대로 지식인의 말장난에 불과하며, 역시 소인배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짓 좌파의 궤변과 폭력성
여기서 우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극도로 이율배반적인 현상의 논리적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민주와 인권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좌파정권이 반인륜적 북한체제 혹은 김정일 파시즘과의 접선지역에 있어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내세워 가장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 이유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파시즘적 북한체제를 옹호하려는 시도가 갖는 논리적 파행에 있다고 보며, 현 좌파정권의 이런 비일관성, 비논리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 질수록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언론법, 사학법, 정권 비판신문에 대한 압력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익히 경험한 일들이 재현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파시즘을 옹호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본질에 있어서, 즉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시 파시스트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폭력의 내적 구조는 상대방에 대한 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의 강요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 좌파정권과 이에 동조하는 시민단체, 지식인들이 북한인권문제와 관련된 저 궤변들은 바로 폭력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소프트 파시즘’의 출현
심지어 열린우리당의 몇몇 중진의원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북한의 무력을 이용하여, 즉 전쟁 가능성을 들먹거리며 북한인권문제 제기를 위협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도 바로 정당한 논리의 결여에 있다. 파시즘에 항상 필요한 ‘잠재적’ 무력은 북한이 제공하고, 한국의 좌파는 그 도덕적 분식(粉飾)을 위해 민주와 인권을 주장하지만, 이들이 서로가 필요할 때는 역할분담을 하는 남북공조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남북공조를 통해 한국의 좌파는 ‘우리민족끼리’라는 집단적 자기최면에 빠지면서 그 골수에서 도덕적 파탄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친일은 그 도덕적 파탄이 개인의 영역에서 그쳤으나, 지금 한국 좌파정권의 도덕적 파탄은 정부조직이라는 위계질서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친일행위와 비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는 이런 새로운 형태, 즉 사회전반에 걸쳐 민주화와 인권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특정한 영역에서 일방적 억견의 강요로 일어나는 형태의 폭력을 “소프트 파시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논어>에 나온 위의 저 구절은, 적절히 통제되지 않을 경우 바로 소인배들이 파시즘의 주역으로 나타나며 현재 한국의 이 기묘한 이율배반적 현상의 바로 그 원인을 말하고 있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