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은총 대신 붉은 피로 물든 전선의 그날

1951년 12월 강원도 양구 어은산 일대에 포진하던 중공 제204사단은 인근 백석산 북쪽에 돌출돼 있는 국군 제7사단의 전초진지에 공격을 감행한다.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 문제가 쌍방 간의 합의로 1951년 11월 27일 가조인돼, 1개월간의 유보기간을 두고 타 의제에 대한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전후 3회에 걸쳐 교전을 벌이게 된 방어전투가 바로 강원도 양구군 수입면에 위치한 1090고지(일명 크리스마스 고지)전투였다.


195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산야는 백설로 뒤덮여 화이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선에 가득했다.


적의 기습적인 공격은 백설의 고지를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였다. 국군 제7사단은 이날부터 28일까지 4일간 용전에 용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해 고지를 사수했다. 그 이후로는 이름 없던 이 무명의 고지가 ‘크리스마스고지’로 불리게 됐다.


크리스마스고지는 국군 제7사단이 담당한 전선 가운데 가장 북단에 위치한 곳으로서, 적의 주저항선인 어은산에 이르는 통로상의 요지였고 사단이 방어하는 지역의 전초 역할을 하는 요충이었던 만큼 그 중요성이 높았다.


제7사단의 좌측 연대의 우측 대대로서 이 지역 방어책임을 부여받은 제3연대 3대대장 이종익(李鍾益) 소령은 제10중대로 하여금 크리스마스고지 주봉을 전담케 하고, 제9중대는 그 전방의 무명고지인 크리스마스고지상에 경계진지를 점령하여 방어토록 명령했다. 제9중대장 이순호(李順鎬) 대위는 1952년 10월 이 크리스마스고지를 점령한 뒤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0월 6일, 일몰과 더불어 제3대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604연대가 제3대대 9중대의 전초진지인 크리스마스고지를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또 다시 격전이 일어났다. 적은 300여 발의 공격준비 사격을 집중한 후 22시 야음을 틈 타 꽹과리 소리를 울리며 1090고지 북방 약 300m에 위치한 크리스마스고지를 공격해 들어왔다.


중대는 이날 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혼신을 다해 방어했으나 새까맣게 밀려오는 적군에 밀려 고지를 포기하고 크리스마스고지 남쪽으로 철수, 새로운 진지를 긴급히 편성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계속됐다. 크리스마스고지를 점령한 다음 1090고지에 이르는 접근로를 따라 제9중대의 새로은 진지를 계속 압박해 왔다. 800여 발의 각종 포탄을 퍼부어 삽시간에 진지를 날려버릴 듯하더니, 화약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좌우와 중앙의 3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때 아군 제 16포병대대와 미국 제189포병대대가 지원사격을 개시했지만 적은 아군의 치열한 탄막사격(집중포격)에도 불구하고 계속 3면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이 대위는 신속히 방어위치를 조정한 후 소대장들에게 ‘사주방어태세로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하고 자신 또한 결전태세를 갖췄다.


무수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은 아군을 질리게 만들었다. 더욱이 꽹과리와 징소리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적이 가까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적은 잠시 주춤했으나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다시금 파상적인 공격을 계속했다. 특히 중대 정면인 제3소대 지역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제3소대원들은 전력을 다해 분투하며 중대 정면을 굳건히 지켜냈고 적은 병력을 증원하는 등 인해(人海)라는 무기를 앞세우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밀려오는 적에게 제3소대는 소대장이 부상을 입은 가운데 중앙을 내주고 말았다. 이어 중대 후미도 적에게 점령당해 퇴로마저 차단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위기를 직감한 이 대위는 흩어진 제3소대를 수습하기 위해 화기소대장을 보내는 한편 중대본부 요원과 화기소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위는 수류탄을 던지는 등 중대원들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여갔지만, 이 혈전 속에 이 대위는 그만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말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이끌고 이 대위는 적과 사투를 계속했다. 그는 수류탄을 3상자나 투척하며 격렬히 싸웠고, 연락병은 수류탄을 포장한 테이프를 입으로 뜯어주다가 앞니가 2개나 빠지기도 했다. 중대장은 이미 과다 출혈상태였고, 부하들이 후송을 서둘렀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겠다는 의지였다.


이 무렵 대대장은 제11중대로 하여금 고립에 빠진 제9중대를 도와 진지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잠시 멈칫했던 적의 공세도 이어졌다. 제9중대에는 다시 일촉즉발의 위기에 휩싸였다. 중대원 모두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며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투혼을 불사르던 중 적의 흉탄은 야속하게도 이 대위의 흉부를 관통했다.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2시간 30여 분간 처절한 혈전을 벌였던 그였다. 이름 없는 고지에서 이렇게 그는 23세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 대위가 전사한 지 몇 시간 후인 10월 14일 03시, 유칠복(劉七福) 대위가 지휘하는 제11중대는 역습을 감행해 적을 포위 섬멸하고 이 대위의 뜻 그대로 무명고지를 사수했다.
   
죽으면서도 고지를 사수하려 했던 이순호 대위에게는 1952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