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우리가 들어온 6.25전쟁은 남쪽에서 겪은 이야기다. 기습 남침을 당해 서울, 대전, 광주가 차례로 점령 당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나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한 내용이다.
평안남도 평성에서 6.25 발발과 휴전을 겪은 탈북자 김진철(75) 씨는 전쟁은 폭격이라는 기억이 깊다.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던 폭격에 흩어지고 도망다니던, 그 난리통에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을 잡고 질기게 살아남은 시절이다.
전쟁이 시작된 날도 평시와 다름 없었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오고 갔지만 김 씨 가족은 남한으로 갈 기회만 살피고 있었다. 평성에 있는 할머니 병환 때문에 가족이 북쪽으로 왔다가 3.8선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남한의 기습적인 북침에 반격을 개시, 사흘 만에 서울을 수복했다”는 내용의 6월 28일 김일성 라디오연설을 듣고서야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전쟁이 뭔지도 몰랐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그만큼 전쟁은 북한에서도 은밀히 준비됐다.
당시 여덟 살이던 김 씨는 전쟁 발발 7개월 만에 고아가 됐다. 김 씨는 6.25를 “치가 떨리는 공포였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가 폭격으로 돌아가셨는데도 돌아오기를 너무도 기다렸다. 어머니를 기다릴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6.25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평성 사람들은 연합군의 공습을 겪기 전에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늘에서 시꺼먼 것이 떨어진다고 구경을 갔다니까. 그런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보겠다고 간 사람들 위로 떨어진 게 폭탄이었다. 전부 죽었다. 친구들도 ‘비행기 똥 싸는 것 보러가자’고 할 정도였다”고 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발발 후 3일만에 미국 해·공군의 한국군 지원을 승인하고, 미군은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된 다음 날인 29일부터 전략폭격기 B-29 슈퍼포트리스를 동원해 평양 등 주요 도시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폭격이 시작되자 김 씨 가족은 공습을 피해 평성 외곽의 산골로 들어 갔다. 움막을 치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매일 공장에 출근했던 아버지는 그해 8월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김 씨는 “공습경보에 동료들과 반공호로 피하자마자 포탄이 떨어져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마저 다음 해 1월 그의 곁을 떠났다. 김 씨는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 쌀표(월급)을 받으러 갔던 어머니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러다 폭격을 맞아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때부터 어린 김 씨의 고난은 더욱 심해졌다. 한줌의 쌀과 풀을 섞어 만든 풀죽으로 연명하는 일이 잦아졌다. “풀죽에 독풀이 섞였는지 입주변이 통통 붓는 날이 많았다. 어렸기 때문에 90년대 고난의 행군 때보다 힘들었다”고 당시 처참했던 생활을 소회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이후에도 김 씨의 고난의 계속됐다. 뒤늦게 인민학교(현 소학교)에 들어갔지만 매일 전쟁복구에 동원돼 흙과 돌을 날라야 했다. 김 씨는 “하루 2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매일 강이나 산에 올라 돌과 흙을 날라야 했다”고 했다. 이 같은 일상의 반복은 그가 전문학교를 졸업하는 1965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휴전협정 이후 가장 힘들었던 기억에 대해 남한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차별과 멸시를 당했던 것을 꼽았다. 폭격으로 사망한 아버지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당국에선 남한으로 달아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배급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북한은 휴전협정 이후 전쟁 사망자 가족에 대한 배급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 월남자 가족은 배척했다.
김 씨는 전쟁 이후 노동자로 생활했다. 1948년 할머니의 병환 때문에 평성을 찾았다가 휴전선 일대 경계가 강화되면서 잠시 머물렀던 길이 한 평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보다 더한 1990년대 대아사를 견뎌야 했다. 탈북해 고향에 돌아오면서 그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데는 64년이 걸렸다.
[탈북 전쟁고아 김진철 씨 인터뷰 전문]
-1950년 6월 25일, 평성의 모습은?
아버지는 평성의 공장에서 일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5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일요일인 그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친구와 함께 낚시를 갔다. 주변 일상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전쟁 소식은 언제 들었나?
3일쯤 후에 미국과 남조선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김일성의 라디오연설을 듣고 알았다. 전쟁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나이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어머니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어머니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군대들이 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왜 하는지도 몰랐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눈으로 봤으니까 무서운지 알았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평성(평안남도)에 살던 할머니가 앓는다는 소식에 1948년에 문안을 갔었다. 되돌아오려고 했을 때는 분계선이 너무 살벌해서 넘어올 수가 없었다. 형을 친척에 맡겨두고 왔는데 다시 못 가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갈 기회만 살폈다. 부모님은 전쟁이 터졌다고 하니까 한편으로 남으로 돌아갈 수 있을 조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어머니가 ‘차라리 잘됐다. 내려갈 길이 있을 수 있겠다’고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흘 만에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전쟁 소식을 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에서 폭탄이 수없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시커먼 것이 떨어지는 것을 구경 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다. 친구들은 ‘비행기 똥 싸는 것 구경가자’고 했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는데 옆집 오빠가 대문 앞에서 폭격에 맞은 시체를 봤는데 공포 그 자체였다.
폭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50년 10월, 아버지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출근했다가 공습경보에 반공호로 피신하다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체를 찾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김 씨의 눈은 빨갛게 충혔됐다.) 어머니도 다음 해 3월 아버지가 다녔던 공장에 쌀표(월급표)를 받으러 갔다가 시체가 돼 돌아왔다.(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김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피난생활은 어땠나?
50년 7월에 평성 중심에서 벗어난 산으로 피난을 갔다. 하늘에선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 폭격을 못한다고 해서 자리 잡았다. 전쟁이라면 치가 떨리고 지금도 김일성을 용서 못한다.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고통스러웠던 그날(51년 3월 어느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꽉 막혀온다.
친척이라면 할머니와 삼촌이 한 분 있었는데, 삼촌은 OO대학을 다니다가 곧바로 군대에 끌려갔다. 그 다음에는 할머니하고 동생과 이렇게 살았다. 배급이 끊겨 풀에다가 쌀 한줌 넣고 끊인 풀죽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가끔 독풀을 섞여 얼굴이 통통 붓고 열이 오르기도 했다. 3년을 그렇게 고생했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땅을 파서 거적을 씌운 움막 같은 곳에 살았으니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린 나에게는 두레박질도, 동이를 이고 물을 나르는 것도 벅찼다.
-연합군이 평성에 왔을 때 상황은?
국군과 미군은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피난을 갔던 사람들도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는 과자 등을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 자유스런 분위기에 예배당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예배당에 다닐 수 없었다. 계속 산속 움막에 살았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기억은 많지 않다. 다만 할머니가 과일 행상 등을 할 수 있었다.
-휴전협정 후 생활은?
55년에 인민학교(현 소학교)를 들어갔다. 토굴-단층-아파트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인민학교만 3번 옮겼다. 당시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것에 대한 복구건설이라고 해서, 구덩이를 메우는 작업을 어린애들이 했다. 집짓는 것은 어른들이 했다. 선생님의 인솔 하에 계속 복구 작업에 동원됐다. 학교에 가면 2시간 공부하고 오후까지 폭격에 패인 웅덩이 등을 메우는 일을 했다. 당시 교원들은 전쟁은 미국과 남한 이승만 대통령이 일으켰다고 선전했다. 할머니 역시 복구 부역을 나갔다. 전쟁복구만 10년 정도했다.
부역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벽돌도 나르고 돌 나르고 흙 파서 질통과 가마니에 메고 다녔다. 몇 분만 지각해도 비판받기 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다녔다. 배급도 잘 나오지 않아 당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십만이 굶어 죽었던 90년대 ‘고난의 행군’ 때보다 어려웠다.
-복구 작업은 언제까지?
전쟁 복구는 60년대에 끝났다. 65년까지 학생 절반, 건설 노동자 절반이 함께 노력동원을 했다. 학생들은 오후에 부역을 나갔다. 대동강 주변, 김일성종합대학 확장공사, 도로공사 등 학생들이 일을 많이 했다. 중학생 때부터는 농촌동원도 나가야 했다.
복구 작업에 동원돼도 배급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국가에서는 사상무장을 강조했다. ‘100년이 되도 복구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는 이겨나간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일을 했다. 그래서 배고프다는 말도 못했다.
-학교에서는 무얼 가르쳤나?
가장 먼저는 남한과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 강조됐다. 그리고 50년대에는 국어, 산수, 자연,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 특히 삼국, 고려, 조선시대 등의 역사와 이순신, 을지문덕, 강감찬 등의 위인들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60년대 들어서서 김일성의 혁명역사만 가르쳤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배급이 나오지 않았나?
삼촌이 제대해서 부양을 받고 살았지만 그때도 배급이 많지 않아서 풀죽으로 연명할 때가 많았다. 정말 힘들었다. 할머니도 직장을 다녔다. 아버지, 어머니가 전쟁 중에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관련해선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미해명 당사자로 분류해 관련 배급이 나오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아버지가 서울로 도망갔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평생 상처가 됐고 힘들었다. 특히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차별이 심했다.
-남한 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나?
그때 당시 남측에 도움 줬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서울 등 남한 출생들은 힘들었다. 간첩짓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남한출신’ 딱지가 붙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남한과 미국에 대해 욕을 많이 했다. 토대가 나쁘다는 사람들은 평양 등에서 다 추방당해 탄광 등 산골 오지로 옭겨졌다.
당시 수용소로 끌려간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남한 출신 인텔리(지식인)들은 거의 모두 추방됐다. 국가에서 북침했다고 하니까 진짜 밑에서 쳐들어 온지 알았다. 지금은 북한 사람들 모두가 전쟁도발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다 안다.
당시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됐는데 그 사람들을 타도하자고 선동하다 보니까 남한 출신 인텔리들은 다 나쁘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들 지지자들까지 모두 처단하다 보니까 남한 출신이라고 하면 무조건 수모를 많이 당했다. 복구작업을 할 때도 그 사람들(남로당 출신들)을 타도하고 오직 김일성만을 옹호해야 한다는 구호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