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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4일 영변 핵시설에 대한 가동 중단에 이어 북핵 불능화 이행 의지를 밝히면서 정부 안팎에서 평화체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청와대는 평화체제 논의가 아직은 이르다며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밝혔지만 정치권의 남북정상회담 추진설과 맞물려 대선정국을 뒤흔들 태풍의 눈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지난 18일 2박 3일간 금강산 방문을 마친 후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여러 가지 내용을 담은 평화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며 “정부가 조만간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평화체제 논의가 중요하다”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 구체적인 시점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8·15 이전에 부분적으로라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신언상 통일부 차관은 다음날 정례브리핑에서 “평화증진이나 평화체제나 평화문제가 (남북간에) 한차례 논의돼야 할 시기”라면서 “장관급회담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아이디어 차원의 생각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 흘러나온 섣부른 얘기들”이라며 급하게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일 민주평통 출범식에 참석 “한반도 비핵화를 조속히 달성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 평화체제 테스크포스 가동
대통령이 평화체제로의 조속한 전환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정부 내 움직임도 빨라질 전망이다.
현재 정부 내에는 청와대와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등 외교안보부처가 참여한 범정부 차원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태스크포스(TF)가 가동되고 있다.
평화체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다.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이 회의에서 부시 미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을 언급해 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측 정부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부시 대통령은“내 생각은 (평화협정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다. 우리가 함께 임기 중에 이 문제(북핵문제)를 다 해결하자”고 말했다. 이어 “자, 저쪽에 김정일이 앉아 있고 여기에 당신과 내가 앉아서 함께 종전서명을 하면 되지 않으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북한이 2.13 합의 초기조치를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던 ‘평화체제’ 논의가 북한의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질 태세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범여권 진영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체제’를 통해 정국 반전을 시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미국도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을 올해 안에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어디까지나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최근 “비핵화 이슈를 해결하기 전에 평화체제를 달성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한국은 평화체제 논의 조연 수준
북핵 6자회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북미 협상의 조연 수준이다. 북한이 남한을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로 받아들일지도 문제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은 남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1968년 미국, 남베트남, 월맹, 해방전선(베트공)의 4자회담 형식으로 열린 ‘베트남평화회담’이 사실상 미국과 월맹과의 양자회담으로 진행됐고, 이후 미군 철수와 월맹의 베트남 무력통일이 진행됐다. 북한은 이 시기 이후 ‘대미 평화협정’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북한은 이후 남한을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과의 양자협정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1994년 5월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밝혔듯이 ‘남한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실제 당사자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미국이 남한의 군사통수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체결이 말로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남측의 안보 공백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북한은 지난 13일에도 판문점대표부 대표 담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와 안전보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쌍방이 합의하는 임의의 장소에서 아무 때나 유엔 대표가 참가하는 조(북)-미 군부 사이의 회담을 진행할 것을 제의한다”고 밝혀 남한을 제외한 미북 양자회담을 재확인 했다.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제의하면서 유엔 대표를 참석 시키자고 한 것은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를 연계시키려는 전략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핵심은 ‘주한미군’ 철수이다.
평화협정이 어떠한 형태로 체결되든지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남한 내에서는 한미동맹에 대한 당위성에도 의문이 제기될 게 뻔하다.
이처럼 국가 안보에 지대한 영향일 미칠 수밖에 없는 ‘평화체제’ 논의가 국민들의 동의 없이 진행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북한이 남한 대선을 의식해 연말까지는 2.13 합의를 적극 이행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할 것이란 분석이 안보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미국과 직접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군 철수를 연계시키려는 의지가 분명하고, 미국은 비핵화 이전 평화체제 논의 진전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현 시기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체제 논의는 2007년 대선을 위한 남과 북의 민족공조 세력의 합작쇼가 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범여권 한 대선후보의 주장대로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6·15선언을 능가하는 남북 평화공동선언이 나온다면 남한 대선국면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