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의 시작, 주체의 어원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1950년대 중반 중소갈등에서 찾는다. 중소갈등 국면 북한이 어느 편에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교적 독자노선(등거리 외교)을 추구하기 위해 주체사상이 대두되었다고 이해한다. 이는 경제적, 외교적 측면에서는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적 측면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먼저 왜 중소갈등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소갈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북·소 갈등 양상도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후루시초프 정권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났다. 1956년 2월 말, 소련공산당 대회(제20차)에서 스탈린의 일인지배체제(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집단적 지도체제방식을 추구한 것이다. 이 결정은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모택동과 김일성은 스탈린의 정치방식을 선호하며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 대회에 북한 대표로 참여했던 최용건의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소련의 정치 격변에 대해 매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북한의 정치지형은 김일성 중심으로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연안파(중국계)와 소련파의 견제구도 하에 있었다. 북한의 소련파들은 김일성이 소련의 정치체제 방식을 따를 것으로 기대하며 박창옥을 내세워 지도방식의 전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1956년 3월 20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을 일절 부정했다. 한 달 후에 열린 당 대회(4.23) 보고에서는 처음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소련식 정치방식 전환을 자국의 실정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김일성이 ‘주체’라는 말을 꺼낸 것은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 비판을 교조적으로 북한에 적용시키지 말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 용어가 대두된 것이 외교적, 경제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이 훨씬 크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소련의 집단지도체제를 북한에 도입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주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8월 종파사건, 김일성 독재로 가는 출발점
소련파는 1956년 6월 1일부터 시작된 김일성의 장기외유(소련 및 동구라파 방문)를 틈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그를 경질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는데, 여기에 연안파(중국계)도 합세했다. 김일성은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1955년부터 북한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김일성의 대형초상화가 군중대회에서 전면 등장하였고 김일성 동상(보천보 전적지)도 세워진 것이다. 물론,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정의 전략에 의해 월북작가인 한설야의 ‘영웅 김일성장군’과 소련군 장교출신 시인인 조기천의 ‘백두산’을 통해 김일성이 민족의 영웅, 민족의 유일지도자로 선전되었었다.
김일성이 귀국하자 부수상이었던 최창익(연안파)은 7월 20일에 김일성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김일성의 측근들에 대한 친일파 논란도 거론했다. 김일성 정권의 핵심 세력들 중에서 친일파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다음 달 8월 21에 열린 당 상무위원회에서 최창익은 다시 김일성 측근들(친일파)의 강력한 경질을 요구했고 연안파 수장이었던 김두봉도 이에 동의했다.
이렇게 8월 30일에 열린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인 최창익과 윤공흠은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성토하며 소련의 집단지도체제 도입을 주장하였다. 수세에 몰린 김일성은 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 세력의 중심으로 최창익과 박창옥(소련파)을 지목하며 당적 처분을 제안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이들은 ‘종파적 음모’, ‘반당적 음모’를 기획했다고 비판을 받았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것이 ‘8월 종파사건’이다.
이들에게 붙은 또 하나의 죄목이 바로 ‘사대주의자’였다. 사대주의자들을 척결하는 데 활용되었던 것이 바로 ‘주체’라는 용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개인독재 권력을 구축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체’라는 용어가 김일성 중심의 정치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후, 1967년에 빨치산의 한 부류였던 갑산파가 제거되면서 김일성 일인지배체제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주체사상이 구체화 되었고 또 주체사상(당의 유일사상)을 확립(계승)하기 위한 10대 원칙이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영웅화를 넘은 김일성을 절대화하며 신격화시키는 출발점이었다. 이 10대 원칙은 북한 전체 인민이 수용하고 지켜야 할 행동강령으로 김일성에 대한 절대복종을 이끌어내었다.
2021년 개정 당규약, 항일에 기초한 주체사상임을 천명한 이유
주체사상은 본질적으로 김일성의 혁명정신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김일성 혁명정신은 곧 빨치산 정신으로, 주체사상의 요지는 김일성을 민족의 해방자, 구원자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주체’의 어원이 김일성이 만주에서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1929)하고 활동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 카륜(화전)에서 김일성이 연설한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주체’의 의미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주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은 김일성의 항일혁명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주체사상의 핵심은 김일성의 혁명정신, 혁명사상을 본받고 계승하여 조국 통일의 목표를 달성하자라는 것이다.
2021년 들어, 북한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을 이전과 달리 명확하게 제시한 점이다. 북한이 지난 1월 제8차 당 대회를 열어 당 규약을 개정했다. 김정은이 당 총비서로 추대된 것, 김정은의 대리직인 ‘당 제1비서’가 신설된 것을 비롯해 상당히 괄목할 만한 내용도 있지만 주체사상에 관련된 것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본다.
다음은 주체사상의 시작점을 분명히 밝힌 2021년 개정된 당 규약 내용이다. “조선로동당은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창조되고 발전풍화된 주체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끊임없이 계승발전시킨다”이다. 분명히 주체라는 말이 항일혁명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전의 관련 당 규약인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 이룩하신 주체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계승발전시키며 당건설과 당활동의 초석으로 삼는다”(2016 당규약)라는 내용을 전면수정한 것이다. 이전에는 주체의 혁명전통(주체사상)을 김일성과 김정일이 이룩한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었다. 그런데, 2021년에는 주체사상이 항일혁명시기부터 출발했다고 못을 박고 있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토대가 항일, 반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왜, 북한은 2021년 들어와 주체사상을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북한헌법보다 더 권위 있는 당 규약에 공식적으로 천명했을까? 더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김일성의 항일혁명정신 계승과 연결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김일성의 항일혁명정신 계승은 김정은 정권에 있어서는 항미(반미)로 연결된다. 외세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결의로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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