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포커스] 과거 북한이 시행했던 토지개혁과 그 연결고리(1)

토지개혁
토지개혁에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일제하의 토지수탈정책을 맹비난한 북한

이달 3월 11일(수요일), 북한 노동신문은 뜬금없이 일제 강점기하에 있었던 토지수탈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었다. 이날, 관련 기사가 쏟아진 것은 일제가 1910년 3월, <토지조사국관제>를 제정하면서 토지수탈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신문은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 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라는 구호 아래 세 가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악명높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식민지예속화를 노린 일제의 날강도적인 토지략탈행위’, ‘통채로 떼운 부대밭’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식민통치시기에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토지수탈을 했다고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일제의 조선 토지수탈을 반인륜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김정일의 교시를 내세웠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첫 시기부터 <토지조사령>과 <회사령>, <조선광업령>, <어업령>과 같은 식민지 악법을 조작하여 주요생산수단을 강탈하고 지하자원을 략탈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였기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 장악이 식민지 지배권의 필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일제의 토지약탈행위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04년-1905년에 걸쳐, 토지약탈을 준비한 일제는 1906년에 토지와 건물 약탈을 합법화하기 위해 <토지가옥증명규칙>을 만들어 이 수속을 밟아 지방행정기관으로부터 인정받은 토지소유권만 그 권리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해에는(1907) <토지건물저당집행규칙>을 만들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나 은행업자들이 대부공간을 리용하여 합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대에 들어서, <토지조사사업>(1910), <토지조사령>(1912)이라는 구실로 토지약탈을 본격 감행했다는 것이다. <토지조사령>은 종전에 조선 정부가 인정해온 토지 소유관계를 전면무효화하며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도록 하는 것으로 오직 일제에 신고하여 승인받은 것만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사 말미에는 일제의 토지약탈행위야말로 그 비법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로서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고 덮어버릴 수가 없다고 맹비난했다.

마지막, 기사는 일제 강점기때 지주들의 악락한 행위를 고발하는 것이다. 노동신문이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 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라는 제하로 왜, 일제의 토지수탈문제를 이렇게 집중 조명했는지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필자로 하여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마음을 들게하며 북한초기 정권시, 김일성 빨치산세력의 토지개혁을 살펴볼 마음을 갖게 했다.

소련 및 위성국가와 중국의 토지개혁 특징

토지개혁이란 토지의 재분배와 소작권의 보호 이 둘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토지개혁은 통상적으로 계급 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실시된다. 역사적으로 토지개혁은 사회주의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분모였는데, 여기에는 저변에 깔린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열망이 혁명적 상황으로 이끌어 국가형성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소련의 토지개혁은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기는 혁명으로부터 1921년 3월, <식량세> 공포까지, 제2기는 신경제정책기간인 1928년까지, 제3기는 집단화가 성립된 계획 경제기간으로 구분된다. 제1기 기간인 1917년 11월 8일 혁명 다음 날에 공포된 <토지소유에 관한 포고>로 자국내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제1조), 개인의 토지뿐만 아니라 국유지, 수도원지, 교회의 소유지와 부속된 도구, 가축, 건물등 부속물과 더불어 지방 토지위원회 및 농민대표자 소비에트의 관리에 부쳐지게 되었다(제2조)

제3기에는 <농업 집단화> 추진, 설립된 농장이 3만 3천개(총면적 120만ha)나 되었는데, 그 와중에 농민들의 저항을 강력하게 진압하며 집단농장화 강행, 반대파 숙청을 통해, 사회주의 협동농업체제를 성립하였다.

소련의 위성국가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일차적으로는 소작농에게 일정 부분 토지를 분배(폴란드, 동독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 무산농민에게 분배/ 헝가리, 체코슬라바키아는 지주농지를 유상몰수 방식으로)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제2차 토지개혁에는 토지의 재분배와 ‘집단농장화’가 중점 추진되었다. 루마니아는 1945년 3월에 토지개혁이 단행됨으로써 이른바 적산토지와 50ha를 넘는 대지주의 소유지는 몰수되었다. 그에 따라서 132만 5천ha의 토지가 일단 국유화되었고, 그중 115만 5천ha의 토지는 87만의 무토지 농민 또는 빈농에게 거의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중국의 토지개혁과정은 대체로 4기로 나뉘는데, 제4기는 중국이 정권 수립에 성공한 직후 2-3년 동안 토지개혁의 전면적 실시(지주계급 토지 몰수, 농민에게 분배)와 농촌의 집단화를 추진해가는 시기이다. 반봉건적 통일전선의 대상이 되었던 농민은 당시 인구의 90%에 육박했다. 1953년부터, 집단화 양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소련 및 위성국가들, 그리고 중국의 이 같은 ‘집단농장화’ 방침는 기본적으로 맑스-레닌의 교리(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토지개혁들은 각국의 실정에 따라서 그 양태나 절차에 다양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종국에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토지개혁을 활용했던 것이다.

김일성
1949년 애국미헌납운동 모범농민과 이야기하는 김일성. / 사진=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해방 후, 토지개혁 이전의 사회적-환경적 요인 

북한도 마찬가지다. 소련 군정의 지원 아래, 김일성 빨치산 세력의 토지개혁(1946.3)은 혁명적 속성을 강하게 내포했다. 즉,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토지소유 구조와 정치권력 구조가 매우 연동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 이후, 공산당 회원이 무려 80배(1945년 12월, 4,530명에서 1946년 8월, 366.000명) 가까이 증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토지개혁이 피지배계층(농민)들의 마음을 얻자, 당시 토지개혁의 파급력에 위기를 느낀 조선민주당 당수였던 조만식 선생(평양 고려호텔 감금시)은 남한의 미 군정에게 서신을 보내 남한지역에서도 토지개혁을 시행할 것을 촉구했을 정도이다.

김일성 세력의 토지개혁 목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었다. 즉, 광범위한 농민계층을 혁명계급으로 편입시켜 취약한 권력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국가형성주체들을 세우는 사회혁명(론)이었다. 북한도 토지개혁으로 인해 정치, 사회, 경제구조가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다.

일제강점기하, 1920년대와 1930년대 전반기에 걸쳐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환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42년 말, 봉건 지주는 전 농가 호수의 3.3%에 해당되었으며, 전 농경지 면적의 62.2%인 2,775,742정보(1정보 3천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나머지 96%에 달하는 농민들은 겨우, 전 농경지 면적의 37.8%인 1,690,936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즉, 지주 1호당 26.7정보를 소유한 반면, 농민 1호당 0.55정보를 소유했던 것이다.

북한지역만 보면, 1943년 말, 북한의 총 경지 면적 1,982,342정보 중 지주의 소유경지면적은 1,154,838정보로 전체의 58.2%를 차지하였다. 지주 호수는 총 농가 호수에 비해 불과 4%에 지나지 않은 4만6134호였다. 농가 호수의 56.7%에 달하는 빈농들은 겨우 총 경지면적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작농(43.4%)은 지주에게 50-60%의 소작료를 지불하였는데, 소작료를 지불하지 못한 이들은 산중으로 도망하여 화전민이 되었다. 북한지역에서만 화전민이 130여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 가운데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은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세력(빨치산파,소련파,연안파,국내공산주의파)과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했다. 당시,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무엇보다 농업부문에서의 생산성 증대가 정치적 선점을 하는 지름길이었다. 그 방안으로는 농민들의 생산의욕 고취 및 농경지 확대였다. 그런데, 당시는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반봉건제적 토지소유구조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매우 팽배해 있었다. 토지개혁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적 요인이 조성된 것이다.

김일성
1945년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 사진=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김일성 세력의 토지개혁 진행 과정 및 그 전략

이때, 소련 점령군이 토지개혁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이것은 1945년 9월 14일, 소련군사령부 정치위원 크로챨의 <소련 점령군의 대북한 통치정책(인민정부 수립요강>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크게 5가지의 통치정책이었다. 그 첫 번째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 제안이었다. 두 번째에서 토지문제를 다루었는데, 토지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인구수에 비례해서 토지를 재분배하고 토착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에는 전부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소군정은 일제 잔재의 청산 및 소련에 우호적인 노동자, 농민 중심의 인민 정권 수립과 토지개혁의 실시 등을 지침으로 내렸다. 그 결과,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1945.12.17.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수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했다. “토지문제는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선차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초미의 문제입니다. 토지문제를 해결하여야만 농촌에 뿌리박은 반동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고 농민들을 봉건적 착취에서 해방하여 그들의 정치적 열성을 비상히 높일 수 있으며…” 이 반제반봉건적 민주주의혁명은 제2단계로의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예비적 성격의 혁명이었다. 토지개혁도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되어진 것이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토지개혁 이행과정과 궤를 같이하여 농민들의 강렬한 열망과 더불어, 점령군 소련의 강력한 지원 가운데 실시 되었다.

김일성 세력은 농민들과의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토지개혁 첫 단계로 ‘3·7제’를 제시한다. 이것은 농작물 수확의 30%를 지주에게 소작료로 지불하고 나머지 70%(해방 이전에는 50-60% 지불)는 소작인이 가지는 것이며 소작인이 부담하던 토지와 관련한 세금은 지주가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3·7제 투쟁에 대해 “우리는 3·7제 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농민들의 혁명적 기세를 지주의 땅을 빼앗기 위한 투쟁에로 계속 발전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전략이었다.

나름 정당성을 확보한 김일성 세력은 세 번째 단계로, 물리력,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일환으로 도, 시, 군, 면에 보안소 설치하고 장악하였다. 여기에 대해 김일성은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지주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할 수 있는 인민주권과 군대, 안전기관과 같은 권력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보안소와 별도로, 농촌에는 준군사적조직인 ‘농촌자위대’가 18세-35세의 건강한 농민들로 조직되었다. 1946년 3월경 21만 명이 여기에 가담했는데, 한 개 리에 3-5개의 분대(1분대에 8-10명)가 결성되었다. 이들이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토지개혁에 앞장섰다. (다음에 계속)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