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포커스] 과거 북한이 시행했던 토지개혁과 그 연결고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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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김일성이 농촌마을을 시찰할때 모내기를 하는 장면. / 사진=조선중앙통신

토지개혁의 선발대, ‘농촌위원회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지도아래 실시 되었고 그 집행 임무(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에 관한 결정서(1946.3.7.)를 맡은 기관은 지방행정구역에 있어서는 도, 군, 면의 각 인민위원회였고, 농촌에서는 ‘농촌위원회’였다. ‘농촌위원회’는 각 촌, 동에 5-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빈농, 고농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토지개혁 법령 결정서를 직접 반포한 김일성은 농촌위원회가 토지개혁의 직접적인 집행자가 되도록 했다.

농촌위원회의 구체적인 임무는 어떤 지주에게 어느 정도의 토지를 몰수할 것인가에 대해서 명부와 계획안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다음, 작성된 토지개혁실시계획안을 면 인민위원회에 송부하여 승인을 얻은 후 토지몰수를 직접 실행하는 것이다. 북한지역에서 농촌위원회가 대략 11,500개가 조직되었고 90,600명에 농민들이 구성원이 되었다. 소작농이 95% 이상을 차지했다. 농촌위원회는 토지조사대, 선전대, 행동대, 자위대, 연락대, 경비대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자위대, 연락대 등은 토지개혁과정에서 농촌위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계급노선·계급투쟁 성격의 토지개혁

토지개혁실행을 위한 제반 사항이 준비되자 김일성 세력은 본격적으로 토지개혁실시에 돌입했다. 토지개혁법령과 함께 공포된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의 적용으로 지주들의 토지개혁 반대 행동은 철저하게 억제되었다. 지주의 재산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몰수대상 토지의 확정은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김일성은 토지의 몰수대상을 옳게 규정하여 누구와 동맹하며 어떤 세력을 반대하며 누구를 고립시키겠는가 하는 계급투쟁의 전략 전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몰수대상 토지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나라 농촌의 토지소유관계와 계급관계를 구체적으로 료해분석한데 기초하여 일제놈들과 그 앞잡이인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토지와 5정보 이상을 가지고 있는 지주의 토지, 그리고 자기가 경작하지 않고 남에게 소작주는 모든 토지를 몰수대상으로 규정하였다.”라고 했는데, 이는 몰수대상의 선정이 철저히 계급노선에 입각한 집행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북한지역에서 몰수된 토지는 총 100만 325정보로, 일본국가와 일본인 소유지 100정보, 민족반역자의 소유지 21,718정보, 5정보 이상의 지주 소유지 285,692정보, 전부 소작주는 자의 소유지 338,067정보, 계속적으로 소작주는 자의 소유지 239,050정보, 성당-승원-종교단체의 소유지 14,401정보 등이다. 몰수토지의 총량은 북한의 총 경지면적 198만 2342정보의 52%에 해당된다. 지주토지 몰수량만 885,127정보로 당시 지주의 총 소유토지 115만 4,838정보의 80%로 지주들의 토지는 거의 몰수되었다.

북한토지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의 토지개혁과정과 비교할 때 단시일 안에 철저하게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확인한 대로, 소련 및 동구라파 중국에 이르기까지 토지개혁이 수(십)년간에 걸쳐서 3단계, 5단계로 나뉘어 실시 되었던 반면, 북한에서는 불과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속전속결로 끝낸 것이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일부 동구권 국가에서는 나치, 반역자, 대·중 지주의 토지만이 몰수된 데 비하여 북한에서는 모든 지주적 토지 소유가 일소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유상몰수방식을 취했는데 반해, 북한은 예외 없이 무상몰수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토지몰수 후, 일차단계에서 김일성 세력은 98만여 정보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약 72만 호의 농민들이 평균 1.35정보의 토지를 분배받고 자작농이 되었다. 북한은 분배된 토지에 대해 도 인민위원회가 소유권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하고 토지대장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소유권의 완전한 귀속은 아니었다. 분배된 토지에 대해 매매는 물론 임대, 저당, 상속할 수 없었으며 자신이 경작할 수 없을 때는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토지이용권, 즉 경작권의 분배였던 것이다. 결국, 김일성 세력의 토지개혁 목적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별 농민과 농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이 아닌, 사회주의 협동체제(협동농장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조치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봉건적 소유제도를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북한 농민
북한 농민이 수확 후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협동 농장화 추진과 그 형태

토지개혁 이후 형성된 소농경영 중심의 농업구조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협동조합으로 조직된 것은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부터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소규모로 분산된 개인농을 협동농장으로 흡수하는 ‘농업의 집단화’ 작업을 단행했다. 북한의 농업 협동화는 6년이라는 단기간에 완료되었다. 1년 만인, 1954년에 협동화 비율이 30%에 달했고, 1956년에는 농가의 80.9%, 경지의 77.9%가 달성되었다. 이때 1만 4,700여 개의 협동조합들이 조성되었다. 1958년에는 마침내 100%의 협동화가 완료된다. 기존의 한 개 조합당 평균 20~30호의 농가로 구성되었던 것이 350~400호로 증가 되었다. 한 개 조합원의 수는 평균 700~900여명 정도였고 부양가족의 수는 2000여 명 정도였다. 그 결과 1957년에 1만 6,032개 이르던 협동농장의 수가 1년 만에 1/5로 감소된 3,843개로 통합되었다. 세계적으로도 전례에 없었던 급진적인 협동화의 추진이다.

북한의 농업 협동화 과정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조직되었다. 제1형태는 토지 및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초로 가축이나 농기구의 공동이용을 통한 공동의 농작업을 수행하고 생산물은 각각 소유하는 경험적 단계의 ‘노력 협동반’이다. 제2형태는 토지 및 기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견지하면서 협동조합이 통합시켜 공동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노동일수와 출자한 토지에 상응되게 분배하는 대중적 발전단계의 ‘반(半)사회주의적 형태’이다. 제3형태는 토지 및 기타 생산수단에 대한 협동조합적 소유와 더불어, 생산물을 투입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최종단계인 ‘사회주의 형태’이다. 실질적으로는 협동화 초기 단계부터 사회주의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제3형태가 두드러졌다. 이는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계급이 청산되었고 토지매매금지로 소유개념이 채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전선구축, 3·7경자유전의 원칙

이인영 의원(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은 지난 2월 4일, 돌아오는 4월 총선이 시장·종교·언론 분야의 기존 패권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개헌카드를 다시금 꺼냈다. 당시, 그는 토지공개념에 덧붙여 농업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도 언급했다. 노동대책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제시하였다.

2018년 3월, 청와대에서는 토지공개념의 헌법 명문화를 대통령 개헌안으로 발표했었다. 청와대는 개헌안에 “사회적 불평등 심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토지공개념 내용을 명시했다”고 밝혔다. 당시 찬반여론이 팽팽했는데, 찬성 측은 토지독점과 불로소득, 부동산 투기 등이 근절될 수 있다고 했고 반대 측은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적 개헌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이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도 똑같은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심재철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총선 이후 사회주의 개헌을 선언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토지공개념에 대해서는 국가주의·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며 국민들에게 자유시장경제를 버리고 사회주의경제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여당 관계자는 “토지공개념 등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 토지공개념 문제는 현재 지역구 후보 간(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는 핵심이슈가 되고 있다.

필자에게는 지난 이 의원의 ‘경자유전 원칙’과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시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자신의 편에 끌어들이려는 통일전선 구축의 일환이라고 해석된다. 북한 김일성 세력이 토지개혁에 앞서 농작물 수확량의 ‘3·7제’(지주30%, 소작농70%) 를 내세워 북한 농민들의 환심과 지지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이 ‘3·7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 하는데 있어 농민들을 앞세우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토지개혁 이후 ‘집단 농장화’로 전환한 것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현재 남한의 농촌 상황은 농민들보다 도시민들이 땅을 더 많이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1994년에 제정된 농지법에서는 1996년 이전 취득한 소유자의 경우 농업생산을 하지 않아도 농지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현재, 농업인들은 ‘비농업인의 농지소유 확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경자유전의 원칙’은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농민들의 표를 가져올 수 있는 히든카드가 아닐 수 없다.

여권에서는 토지공개념이 1989년 노태우 정부시기부터 나온 개념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한 발언이 그들의 속내를 보여준다.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이 타당하다.” 이 의원도 총선이 기존 패권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재벌개혁을 강력시사 한 바 있다. 그가 말한 개혁 대상인 재벌은 75년을 거슬러 북한에 도달하면 바로 지주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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