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市, ‘김일성市’로 바뀔 뻔했다

1994년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북한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김정일의 세습권력은 기정사실화 됐지만 좀더 완전한 세습을 위해 마지막 정리작업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추모기간에 술을 먹거나 관혼상제를 엄금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징계했다. 이로 인해 쫓겨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김정일 추종자들은 새로운 착상들을 김정일 앞에 많이 내놓았다. 그중 하나가 ‘평양시’를 ‘김일성시’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업적을 살려 후손만대에 길이 빛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과거 구소련의 ‘레닌그라드’나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베트남의 ‘호치민시’도 있으니 평양시를 ‘김일성시’로 바꾸는 것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김정일의 점수를 딸 만한 제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정일 추종자들의 충성경쟁이 붙었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날조하고(당시 북한의 주장), 북한이 옛 고구려 땅에 대한 고토회복이 안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땅을 찾고 난 다음 ‘김일성시’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는 ‘수령’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수령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직은 통일이 안 되었기 때문에 통일된 후 서울시를 ‘김일성시’로 정해야 한다는 제의도 나왔다. 그러나 통일 후 서울시를 ‘김일성시’로 하고, 평양시를 ‘김정일시’로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있어 ‘김일성시’ 계획은 보류되었다고 한다. 대신 김정일은 수억달러를 들여 금수산기념궁전을 ‘시신궁전’으로 만들고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북한은 대아사 기간으로 거리의 시체를 뛰어넘어 다녀야 할 정도로 굶어죽은 사람이 많았다.

사람 이름 딴 대학은 수도 없이 많아

북한은 역사의 기원을 정할 때 조선의 시조는 단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으로 하고 주체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주체연호는 김일성이 죽은 후 당 중앙위원회 정령으로 발표됐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주체10년’이라고 하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김일성의 생년(1912)을 손가락으로 꼽아서 1921년이라고 이해하곤 했다.

북한에는 이른바 ‘영생’을 기원하는 개인숭배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금강산, 묘향산의 기암절벽에 새겨진 김일성 김정일의 찬양 글발도 다 영생을 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북한은 공산주의자들은 의리를 지킨다며 먼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도시이름 대신 부르거나 대학이나 극장에도 붙인다. 김책시, 김정숙군, 김형직군 등이 대표적이다.

대학은 차광수대학, 김책공업대학, 김철주사범대학, 장철구대학 등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한때는 대학 이름이 너무 많이 달라져 혼란을 겪었다. 과거 자기가 다닌 평양상업대학이 ‘장철구대학’으로 바뀐 것도 모르고 교육국에 전화하여 난리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

이성계가 지었다는 함경남도 영흥군은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뀌었다. 김일성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좋게 보지 않았다. 김일성은 이성계가 자기고향을 ‘영원히 흥하라’는 뜻에서 영흥군으로 지었다고 하자 당장 이름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영흥군은 금야군으로, 함경도의 오로군은 영광군으로, 퇴조군은 낙원군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단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이라고 역사를 날조하는 데야 더 할말도 없는 것이다.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