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가는 내 인생, 왜 태어났을까”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여성 김순희씨(가명, 24세)는 지난 달 탈북자지원단체 <두리하나선교회> 천기원 대표에게 절절한 심경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받은 <두리하나선교회>는 이 여성의 한국행을 돕기위해 중국 현지에서 접촉을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선교회 측과 만남을 가지기 이틀 전 체포, 북한으로 압송된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정부의 ‘탈북자 수용정책 개선안’은 이들의 한국행을 도울 수 있는 탈북도우미의 활동을 제한하고 사전심사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공관진입‘이 한국행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한국으로 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이 젊은 탈북여성에게 우리 정부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다

◆ 김순희의 편지

“저는 더는 이렇게 물건처럼 팔려오고 팔려 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어요.”
“팔려가고 팔려오는 게 내 인생이라면 나는 왜 태어났을까?”

안녕하세요.

전도사님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여태껏 컴퓨터를 통해 많은 곳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전도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신 데 대하여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하지요.

저의 이름은 김 ○○ 나이는 24(1980. ○.○.)세 입니다. 고향은 함경북도이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할머니 그때 년세 80세 정도. 살아계시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었는지 모름).

위로 오빠 한명 있고 아래로 녀동생 한명 있습니다. 제가 5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 후에 우리자매를 데리고 고생하던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어요.

저의 동생은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고 지냈답니다. 저 역시 부모님들의 나이를 모릅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또 할머니에게 어머니 나이를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죠.

부모들에 대한 정이 하나도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많이 후회되요. 그 후로부터 저의 삼형제는 할머니 슬하에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네 집에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갔어요. 제가 15살 나던 해에 외삼촌 한테로부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저희에게는 고생과 시련이 닥쳐왔어요. 식량이 없어 바닷물을 소금 삼아 시라지(시래기) 국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도 없어 산에 가 아무 풀이나 다 뜯어다 바닷물을 넣고 국 삼아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빤 집을 나가고 할머니는 큰 집에, 저와 저 동생은 외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라남여관이란 데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경성도로 건설대에 가고 동생은 남아있었어요. 내가 떠나던 날 내 팔목을 잡고 같이 가자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동동 굴리며 눈물 흘리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앉을 때면 같이 울고 내가 죽으면 자기는 어찌하냐며 내 곁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던 동생을 남겨놓고 떠나야만 했던 그 날….. …..

돌아와 동생을 찾아가 보니 동생은 떠나가고 나의 마음은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쓰리고 아팠답니다. 제가 떠나가고 얼마 안 지나 동생과 몇몇 부모 없는 아이들이 강원도에 있는 학원으로 데려갔다고 했어요. 그때가 1997년 8월 말이었어요..

그 길로 저는 친척집을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에게 할머니를 다른 친척들이 모신다면 저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더군요. 다른 친척들도 생활이 곤란해서 할머니를 모셔 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날 밤으로 2시간의 길을 걸어 라남역전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날을 샌 다음 청진 역전에 와서 사탕장사를 하면서 하루하루 먹고 살았습니다. 어떤 때는 사탕으로 끼니를 에운 적도 많았지요.

그렇게 며칠을 보내는데 한 여인이 중국에 가면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면서 중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부터 중국에 가면 피도 뽑아내고 사람도 죽인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중국에 가서 죽으면 죽고 살면 좋고 하는 생각에 선뜩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산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그 여자는 나를 데려다 준 값으로 돈을 챙겼어요. 화룡을 거쳐 룡정에서 6일 있다가 또 연길에 가서 어떤 한 사나이한테다 저를 팔아 넘기였어요. 그 사나이는 저를 또 다름 사람에게 팔 생각을 하였어요.

하여 나를 데리고 자기의 어머니 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저 나이 19살(중국에 온지 7일 되던 날). 하지만 그 당시 저는 먹지 못해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 나이가 12살 밖에 안돼 보였어요. 그러니 누가 저를 보겠어요. 오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19살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간 것이 5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 집에서 밥이랑 하면서 식모질을 하였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팔려 간 것이, 할머니 있는 집에 3000원에 팔려가서 2년동안 살면서 중국말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웠으며 또 그 집 할머니가 교회를 다닐 때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집에 찾아와 신랑을 얻어 준다며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어요. 전 또 장춘에 6000원에 팔려갔어요.

신랑은 벌써 8살짜리 아이가 있었어요. 저는 더는 이렇게 물건처럼 팔려오고 팔려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하여 결심한 것이 도망이었어요. 2번에 걸쳐 도주에 성공한 저는 연길행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팔려가고 팔려오는 게 내 인생이라면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하니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신 부모님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연길에 도착한 저는 아는 할머니네 집에서 우연히 같은 북한에서 온 한 아지미(아줌마)를 알게 되어 지금까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아지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남편 때문에 가정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이혼한 후 4~5년을 딸을 데리고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돈을 벌어보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지요. 그러다가 작년 말 조선에서 중국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그 사람과 함께 나도 회령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동생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군대에 나갔다는 불확실한 소식만 가지고 10일만에 그 아지미 딸을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연길에서 셋집을 잡고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저희는 일자리를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더욱이 지금은 호구조사를 하느라고 검열은 심하고 언제 어느 시간에 경찰들이 집에 올지 몰라 밤에는 불도 켜지 못한 채 보내곤 합니다. 라지오를 통해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희는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답니다.

저들 행렬 속에 우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어느새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 베갯잇을 적시곤 한답니다. 하루빨리 이 무서운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아무리 컴퓨터를 통해서 교회 목사님들과 신문사 기자님들께 이메일을 수십 번 보냈지만 그들한테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었어요. 매일 매일 하나님께 저희를 도와달라고 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려도 저희에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신심을 잃지 않고 저희는 컴퓨터를 매일매일 찾아보면서 매일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조선일보를 통해 탈북자 동호회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두리하나 선교회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전도사님의 이메일과 전도사님의 쓰신 글도 읽게 되었어요. 그 순간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어요. 정말 이제는 살았다 희망이 보인다. 이런 생각에 저는 밤마다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요.

전도사님 도와주세요. 전도사님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전도사님 밖에 저희는 다른 데 알 수가 없어요. 00 00 000에 있는 00님에게 요청을 구해도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요.

전도사님이 이미 많은 탈북자들을 도와 그들을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신 이야기를 저희는 이미 라지오와 컴퓨터를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전도사님 꼭 좀 도와주세요. 더는 이렇게 숨어서 살 수가 없어 막 미칠것만 같아 이렇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럼 전도사님의 건강과 하시는 사업이 순리롭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전도사님의 회답을 매일 매일 기다리면서…

이만…..안녕히! 00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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