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서 나타난 `국가기밀’ 범위

북한 공작원을 접촉한 혐의를 받는 386세대 운동권 출신 장민호씨 등이 야당 대선후보 동향 등 각종 정보를 북한에 전달한 것이 간첩 행위가 되는지 여부가 관심을 끈다.

현행법은 국가보안법과 형법에서 각각 간첩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국보법은 `반국가단체’를 위한 행위를, 형법은 `적국’을 위한 행위를 처벌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실상 개념은 거의 같다.

이번에 적발된 장씨 등이 북측에 넘긴 정보가 국가기밀에 해당한다면 간첩 혐의가 인정될 수도 있어 공안당국의 수사 결과가 주목된다.

공안당국은 해당 정보가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인지에 관한 `정답’이 없는 탓에 먼저 판례 등을 근거로 북측에 전달된 정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죄를 규정한 국보법 4조(목적수행) 1항에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가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때에는 처벌한다’고, 1항 2호에는 `형법 98조(간첩)에 규정된 행위를 하거나 국가기밀을 탐지ㆍ수집ㆍ누설ㆍ전달하거나 중개한 때에는 처벌한다’고 규정돼 있다.

현재 법원은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확립된 판례에 따라 간첩죄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판례에 따르면 국가기밀은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 물건 또는 지식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어야 하며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기밀로 보호할 실질가치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

결국 비공지성(非公知性), 비밀로서의 실질적 가치(實質秘性)와 위험성 등이 핵심이다.

대법원의 종전 입장은 “공지의 사항이라도 반국가단체인 북한에는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면 국가기밀에 속한다”는 것으로, `공지의 사실도 비밀이 된다’는 것이었지만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 등을 감안해 1997년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당시 사건은 2년 간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입수한 국내 정세와 재야 단체의 활동 등에 관한 내용을 편지나 녹음테이프로 북측에 전달한 피고인의 상고심이었으며, 대법원은 신문ㆍ방송 등 대중매체를 통해 수집한 내용은 공지의 사실에 속하는 것이므로 국가기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법원 판결에서는 국내 총선과 관련한 정당 및 재야단체들의 입장, 1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3당 합당 사실, 대통령 후보들의 성향, 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등은 국가기밀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반면 재야단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구성과 구체적인 주장, 재야 인사들의 구체적 동향,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의장들의 이름, `범민족연합’의 1995년 사업계획안 등은 공지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기밀이 된다고 법원은 판결했다.

근래에는 서울중앙지법이 지난달 국내 책자 등을 북측에 전달해 간첩 혐의로 기소된 화교 정모씨 사건에서 한국인명사전과 언론사 연감은 지도층 인사의 신상정보가 망라돼 있다는 점에서, 정보보호학회지ㆍ전자공학회지 등은 최신 첨단이론이 수록된 점에서 각각 국가기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또 서울중앙지법은 8월에 한국국방연구원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변화방향 및 시사점’ 등 게시자료를 출력해 대남 공작원에게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게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국가기밀 탐지ㆍ수집활동에 편의를 제공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법원 관계자는 “현재 대법원 판례는 국가기밀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유추 해석했던 과거 기준에서 벗어나 엄격한 판단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사안마다 구체적인 정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가 애매한 측면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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