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짓는 탈북 건축가 “북에 희망도시 세울 것”

2005년 15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한국 국민이 된 남진현(가명) 씨. 올해 25살이 된 그는 현재 한 건축회사 건축1실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이 회사가 있는 곳은 서울의 강남, 한국의 건축 설계사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다. 현재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한국 정착에 나름 성공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의 바다가 어촌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그가 태어날 때는 이미 배급 제도가 붕괴되어 부모님들은 바다와 시장을 오가며 미역과 새우, 생선 등을 잡아서 팔아야만 근근이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그에게 북한의 기억은 굶주림밖에 없다.

한 두 끼를 거르는 것은 예사고 하루 이틀 굶는 일도 많았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문화주택도 옥수수 한 자루와 바꿔야 했다. 결국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비닐 조각을 기워 깔고 새초(‘억새’를 뜻하는 북한어)를 베어 덮은 오두막 지붕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비를 막을 길이 없어 온몸의 살갗이 허옇게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추위에 떠 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는 따뜻한 집이 그리웠다.

남 씨는 “식량난, 경제난에서 헤어나기 어려웠고 가족이 양실실조로 위험에 처하자 아버지가 큰 결심을 하셨어요. 부모님은 우리 남매를 데리고 탈북해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소를 방목하고 나무와 곡식을 심고 밭에 비료를 뿌리면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혹시나 북송되어 지옥 같은 북한으로 보내질까 두려워 하루도 발을 펴고 편한 잠을 잘 수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런 고달픈 나날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비가 새지 않고 따뜻한 집에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한국에 입국한 남 씨 가족. 그런데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자 여러 가지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남 씨를 비롯한 두 남매의 진로 문제였다. 탈북 청년들이 한국의 일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는 그에게도 넘어야 할 장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하나원을 함께 나온 많은 아이들이 일반학교에서 탈북 자녀들만 모여 있는 대안학교로 들어갔어요. 정착을 위해 뛰어넘어야 할 한국 사회에서, 또 다른 정착을 위해 탈북자만의 울타리를 만들며 만족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탈북자끼리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는 문화는 정착이라는 장벽을 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일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 측에 탈북자녀임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던 부모님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2년간 오갈 데 없는 생활을 해왔던 그에게 생소한 학교 생활과 교칙, 친구 관계는 큰 어려움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언어의 차이를 느낀 학급 친구들이 그에게 말투가 이상하다느니, 어디서 왔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때마다 남 씨는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힘들게 일 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참아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중국에서 힘든 농사일을 하며 다져진 단단한 체력이 그것이었다. 노동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빛과 작지만 근육질이었던 그에게 친구들은 팔씨름을 걸어왔다. 키도 훨씬 크고 당당한 체격을 가진 친구들은 저마다 남 씨의 팔을 꺾기에 나섰지만, 22명 학급 전원이 모두 참패했다. 몇 달 후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다. 학교에는 최고의 달리기 선수로 이름 난 ‘치타’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과 함께 경기장에 나선 남 씨는 학교운동장 여덟 바퀴 만에 그를 제치고 큰 차이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학교의 축구 대표선수가 되면서 다른 학교와의 경기에 빠지지 않고 출전했죠. 자연스레 친구들은 운동 잘 하는 아이라며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저도 마음을 열고 친하게 지내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공부와 현장 경험 바탕으로 건축이라는 꿈에 도전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가던 그였지만, 한 가지 걱정은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과수업을 마치면 학원으로 달려가는 친구들과 달리 남 씨의 가족은 북에 남아있는 가족 걱정에 한 푼을 아끼며 근검절약하며 생활했다. 추운 겨울에도 난방 대신 수면양말을 건네는 어머니에게 학원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서 그는 북한에서 한 몸 가릴 것 없어 추위에 떨고 비에 젖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선택했다. 남 씨는 “내가 꼭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어요. 건축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한 결과지요. 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해서 나의 희망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림 그리는 취미를 곁들여 열심히 공부했습니다”고 소회했다.

남 씨는 고등학교에서 건축설계 공부에 매진했다.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해 건축에 관한 국가 자격증도 여러 개 취득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은 그는 졸업 후 건축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위해 명문대의 건축학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다른 탈북자처럼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남 씨는 졸업 후 취직 고민이 동반되는 졸업증서보다 진로를 개척하고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살아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재수를 준비하면서 고등학교 선생님과 동창들과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던 그에게 담임선생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먼저 건축설계 현장에서 관련 지식을 쌓고 경력을 쌓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 씨는 이를 계기로 건축설계 현장에 뛰어들었다. 신입사원으로 치열하게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며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2년차가 되던 해에 설계사무 소장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매사에 빈틈없는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건축1실 팀장에 임명한 것이다. 엄청나게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대한민국은 노력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

남 씨는 가끔 휴일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산책에 나선다. 울창한 나무와 갖가지 꽃들로 향기로운 서울 거리를 거니며 자신이 직접 설계한 신축 아파트를 어머니에게 소개한다. 이는 통일의 그날 북한에 세울 도시를 미리 보는 것이기도 하다. 10년간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통해 깨달은 정착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희망하는 꿈이 있을 때 배움에 대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목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목표가 있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한국에 제가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고 말했다. 남 씨는 아직 진로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고 그의 꿈은 아직도 설계 중이다. 통일이 된 후 북한에 세울 희망의 도시를 그리는 사람, 그는 통일을 짓는 건축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