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멘토 김영준 씨 “함께 통일 주역될 후배 양성할 것”



▲저널리즘 아카데미 참가 학생들과 인터뷰 중인 탈북민 김영준 씨(뒷모습).

“평소 스스로 ‘끊임없이 배워라’ ‘지식이 곧 부(富)라는 생각으로 도전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운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되돌려주겠다는 꿈을 꾸죠. 특히 저처럼 탈북한 후배들이 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선배이자 멘토가 되고 싶어요. 남북한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을 한 만큼, 통일의 주역을 키워내겠다는 목표를 갖는 게 욕심은 아니죠?(웃음)”

통일 후 남북한에 고향을 둔 학생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가르치는 게 꿈이라는 탈북민 김영준(가명) 씨의 말이다. 김 씨는 현재 서울 양천구 소재 은정초등학교에서 탈북민 학생들의 학교 적응을 돕는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보조 교사와 비슷한 것 같지만, 학업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일부터 북한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치료해주기 위해 상담사와 연결시켜주는 일까지 김 씨가 도맡아야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챙기다 보면 힘들 법도 한데,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는 내내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일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다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아이들이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밝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잖아요. 얼마나 의미 있나요”라고 답했다.

사실 김 씨는 북한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친 경력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북한에서 나름 명성 있는 중고등학교의 체육 교사로 일하게 됐던 것. 학교 교사는 북한 사회에서도 나름 존경 받는 직업이자 수입도 비교적 나쁘지 않은 편이라 김 씨도 앞으로의 길이 탄탄대로일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2009년 11월 말 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改惡)이 되면서 열심히 모아뒀던 돈을 하루아침에 잃었고, 부업으로 하던 장사마저도 접어야 했기 때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슷한 시기에 ‘토대 불순’으로 낙인이 찍혀 교사 일을 지속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가족들이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해 있었던 터라, 소위 ‘탈북민 가족’으로서 교단에 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낙담한 채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차라리 한국에 가서 가족들을 챙기며 행복하게 살겠다고 결심, 2010년 탈북을 감행했다. 물론 그 이후 한국 정착 과정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았다고 한다. 한동안 매일 밤 술을 마시며 갈팡질팡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게 한 건 역시 ‘가족’이었다. 그는 “목숨 걸고 한국까지 와 놓고 막 살면 가족들이 얼마나 속상해할까 싶었다”고 회상했다.

짧지 않은 방황 끝에 취직한 곳은 한 전기회사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실함을 인정 받았지만, 기계를 다루는 것부터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것까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함이 자리했다. 북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행복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것.

결국 그는 자신과 같이 한국 정착 과정서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 후배들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고, 다행히 2013년 탈북 학생들을 도울 코디네이터를 뽑던 학교에 채용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그는 “통일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선 나 역시 끊임없이 도전하고 스스로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석사, 박사 학위까지 따면서 배움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탈북민 후배들을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통일’이라는 큰 꿈을 이루려면 일단 잘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여전히 탈북 학생들을 ‘북한에서 온 사람’ ‘새터민’ 등으로 구분 지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많지만, 여기에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영준 씨와의 인터뷰전문]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린다.

2010년 8월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다. 2년간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가 2013년부터 남북하나재단의 도움으로 은정초등학교 채용 시험에 지원, 합격해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주로 탈북민 학생들이 학업 진도를 무리 없이 따라가고 사회 적응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 학교만 해도 탈북민 학생이 42명이나 된다. 사실 탈북민 학생들은 물론 부모들도 한국 교육시스템을 잘 몰라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보도 제공하고, 학업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은 직접 가르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힘들어 하는 학생들은 심리 상담사와 연결 시켜준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밝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인데, 참 의미 있지 않나.

-탈북 학생들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뭔가?

북한에서도 교사 일을 하다가 왔다. 대학 졸업 후 중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부임 받아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도 가르치는 일이 제일 자신 있다고 느꼈다. 특히 탈북 학생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지금 학교에서 공고를 낸 것을 보고 지원하게 됐다.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다. 탈북민 가정을 직접 방문해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알리는 등 다양한 시도도 하고 있다.

-북한에서 교사였다면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했을 텐데, 어떤 이유로 탈북을 하게 됐나?

2009년 11월 말 북한에서 화폐개혁이 있었다. 이 때 모아놓은 돈을 몽땅 잃고 부업으로 하던 장사까지 접어야 했다. 특히 내 가족들은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해 있었던 터라, (사실이 알려진 후) 소위 ‘토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교사 일을 더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원래는 학교 교감이 되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차라리 자식으로서 효도라도 하자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다행히 한국에 먼저 정착해 있던 가족들과 연락이 돼 이들의 도움으로 중국과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정착해 있던 가족들 덕분에 그래도 사회 적응이 마냥 힘들진 않았겠다.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술만 마시며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가족들이 생각났다. 목숨을 걸고 한국에 왔는데, 이렇게 적응도 못하고 지내면 나를 보는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나라에는 충성하고 부모에겐 효도하자’라는 말이 있었던 것도 떠오르더라. 그래서 마음을 다잡았다. 북한에서 오랜 군복무를 한 덕에 그나마 의지력은 좀 있었나 보다(웃음).

그렇게 정신 차리고 취직한 첫 직장은 전기회사였다. 쉽지 않았다. 북한에서 교사로 지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는지, 조직 생활을 하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한 번은 앉은 자리에서 상사에게 서류를 건넸다가 예의가 없다는 지적을 들었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혼이 나니 많이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북한에선 그게 그다지 잘못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는 과정도 힘들었다. 당시 내 업무는 회사 자재를 관리하는 일이어서 엑셀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아야 했는데, 나중에서야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해 칭찬도 받았지만 초반에는 정말 어려워했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이 생겼나보더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이 다시 생긴 것이다. 고민 끝에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로 했고, 일 때문에 잠시 쉬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졸업 후 취직한 곳이 지금 일하는 은정 초등학교다.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됐다니 다행이다. 남북한 학생들을 모두 가르친 교사가 됐는데, 학생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은 뭔가?

일단 북한에서는 중학생을 가르쳤는데 여기에서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려니 힘들더라(웃음). 아직 철이 없는 나이들이다보니, 어르고 달래면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잔다거나 교사에게 농담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문화적 차이도 느낀다. 북한에서는 수업 시간에 잠을 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북한에선 교권을 높인답시고 학생들더러 교사 눈치를 보게 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교사들이 아이들의 기분을 살피는 모습이다. 늘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북한 교육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한국 교육도 큰 차이로 다가왔다.

어쨌든 모든 건 교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다. 다행히 탈북 학생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이라 기쁘다. 물론 하지 말라는 걸 굳이 하는 모습을 보면 때로 한숨도 나오지만(웃음). 그래도 여느 학생들처럼 두루두루 배우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 코디네이터 일에는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은데, 새롭게 잡은 목표가 있다면?

현재에 안주하고 싶지 않고, 매사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은 없지만, 다른 탈북 후배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남북한에서 모두 교사 경험을 한 만큼, 통일의 주역을 육성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통일의 주역이 되겠다는 목표를 잡는 게 결코 욕심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이런 믿음으로 배움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석사와 박사 학위도 꼭 따고 싶다.
 
– 통일의 주역을 꿈꾼다는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본인에게 ‘통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사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지 않는 한 통일이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통일은 필연적으로 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 때 한국 주도의 통일이 이뤄져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대가 왔으면 한다. 그렇게 이룬 통일 시대에 남북한 아이들을 나란히 앉혀두고 가르치고 싶다. 남북한에서 배운 좋은 것들을 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통일이 됐을 땐 남북한 출신이 구분되지 않고 동등하게 배움의 기회를 누렸으면 한다. 북한에서 온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탈북민’이다. 마치 동등한 학생이 아닌 ‘탈북 학생’이라고 구분지어 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데, 이게 때로는 상당한 부담을 준다. 그래서 남북한 학생들이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내가 가진 재능과 지식을 모두 나눠주고 싶다.

– 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본인에게도 한 마디 해준다면?

자신에게 종종 ‘끊임없이 배워라’ ‘지식이 곧 부(富)라는 생각으로 도전하라’는 말을 한다. 배우는 데 돈을 아끼지 말고, 한 번 목표를 잡았으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운 건 다시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삶을 살자고,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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