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후 北국유재산의 사유화, 엄청난 반발 야기할것

데트레프 카르스텐 로베더(Detlev Karsten Rohwedder). 필자에게 동서독 통일과정에서 이 이름만큼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통일의 주역들과는 달리, 구동독 경제를 되살려 결핍속에서 살아왔던 1천800만 동독주민들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 일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으며, 로베더에게는 이 희생이 죽음을 의미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암시하고 있다.

동독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민재산이란 명목하에 당이 관리하고 있던 재산을 민간에게 이양해 서둘러 시장경제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통일 과정에서 이 방대한 사업을 맡은 기관이 트로이한트였으며, 로베더는 이 기관의 실질적인 초대 대표였다.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제도를 금지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들의 무절제한 부의 축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돼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평등한 사회를 지향했던 사회주의 체제도 부의 편중현상을 막을 수 없었음이 지난 90년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밝혀졌다. 오히려 결핍된 사회에서 권력의 무절제한 남용이 더 큰 사회적 모순으로 나타났던 것이 동구권의 모습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거울삼아 완벽한 장치를 마련한 사회주의 사회에 이렇듯 불합리한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위 인민재산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경제적 권력이 공산당에 위임됐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트로이한트의 임무는 바로 이렇게 공산당이 독점 관리하고 있던 인민재산을 다시 민간에게 환원시켜 주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일은 공산당의 권력기반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됐다.

실권을 행사하던 군부와 당 핵심 간부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트로이한트의 실질적인 초대 책임자였던 로베더도 이 과정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관계와 사업계를 두루 거쳐 왔고, 특히 위기관리 매니저로 정평이 나있던 로베더는 콜 총리로부터 도탄에 빠진 동독 경제를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임무를 시작한지 불과 몇 달이 안 된 1991년 4월 1일, 부활절 휴가 중 뒤셀도르프 자택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로베더는 고성능 저격용 총기에 의해 머리를 관통 당해 즉사했다. 범인은 동독 슈타지(우리의 국가정보원)의 지원을 받아왔던 서독의 적군파(공산주의 극좌세력)였다.

1990년 10월 2일, 통일전야제가 열렸던 동베를린 아카데미 광장의 샤우슈필 하우스에서 헬무트 콜 수상 등 통일의 주역들과 함께 분단 극복의 순간을 감격으로 맞이하던 로베더. 그 동일한 자리에 로베더의 두 남매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동독의 이별을 감격으로 맞았던 그 자리에서 로베더는 사랑하는 두 자녀와의 이별을 고했다.

이렇듯 분단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뜻밖의 갈등과 폭발력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 앞에 전개될 통일의 과정도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임을 직시하고, 통일 한국을 바르게 만드는 데 헌신하는 사명자가 절실히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