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개혁·개방’ 용어 삭제는 블랙 코미디

통일부는 9일 부처 홈페이지의 현안 이슈 개성공단 코너에 ‘개혁·개방’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4일 개성공단에서 “개성공단은 누구를 개혁 ‘개혁·개방’시키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언급하자 닷새만에 후속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을 들러 “그동안 개성공단이 잘되면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김정일과) 대화해 보니 적어도 정부는 그런 말을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개혁·개방’은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통일부는 당초 홈페이지 개성공단 관련 코너에 ‘북한 관리 및 근로자들이 공단 개발 및 운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장경제를 학습, 향후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었다. 그러나 이를 ‘북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 및 경험 습득’으로 바꿨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남북 경협사업 등과 관련해 ‘개혁·개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때마다 ‘북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 및 경험 습득’이라고 풀이해서 써야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게 됐다.

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저자세식 대북협상은 비단 이번 뿐만이 아니다. ‘2007남북정상선언’에서 언급조차 하지 못한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북한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라고 에둘러댔다.

정부의 이 같은 행태는 기본적으로 대북 정책에 대한 비전과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우리가 지원하면 북한은 변할 것이다’는 햇볕정책의 전제는 수정돼야 한다는 요구가 거듭 제기돼왔다. 그러나 이를 수정하기는 커녕 개혁개방은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햇볕의 근본목적 마저 흔들어버렸다.

혹자는 햇볕정책의 목표가 북한의 변화에서 북한과의 공존으로 변질됐다는 고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했다.

남북 경협 사업에 있어 기본적으로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당장은 남한 경제에 이익은 적다. 개성공단만 하더라도 16개 공단 입주 업체중 13개 기업이 적자를 낼 만큼 수익성이 형편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사업이 나름의 평가를 받아 온 것은 ‘개혁·개방’을 위한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이런 전략적 가치를 무시하고 정부 스스로 단순히 ‘북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 습득’ 정도로 깎아 내리면서 ‘개혁·개방은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떠넘기면 ‘개혁·개방’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남북 경제공동체’로의 발전 또한 추동해 낼 수 없다.

아울러 정부의 이 같은 행태는 차기 정부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차기 정부에서 다시 ‘개혁·개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을 우리 정부에게 떠넘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신중치 못한 말 한마디로 김정일은 쾌재를 부르겠지만,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는 부담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어 씁쓸할 뿐이다. ‘개혁·개방’을 요구하면 북한이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자는 대통령을 앞으로도 4개월 넘게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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