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이 끔찍한 인권유린 현장 北 관리소였던 사연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연좌제 때문에 1987년부터 2010년까지 24년간 북한 정치범수용소 18호 관리소에서 인권 유린을 당했던 박주용 씨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 박주용 씨가 태어난 곳이 정치범수용소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계셨다는 얘긴데, 박주용 씨의 부모님께서 수용소에 수감된 이유는 뭔가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기관차를 몰았어요.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 조수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나 봐요. 그 분은 힘 있는 집안의 사람이었는데, 반면 저희 집은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저희 외할아버지가 그 사람의 죄를 뒤집어썼어요. 그는 면제가 됐지만, 외할아버지는 일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 21호 관리소로 갈 수밖에 없었죠. 어떤 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늘 이 정도만 답해주더라고요.

–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세요?

네, 저는 8살 때까지 할아버지 얼굴을 봤어요. 할아버지도 함께 18호 수용소로 옮겨 오셨거든요.

– 외할아버지와 가족 분들이 처음 수감됐던 21호 수용소는 어디에 있나요?

함경남도 단천에 있습니다. 단천시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시골에 위치해 있어요.

– 18호 수용소로는 언제 옮겨갔나요?

제가 1987년에 태어났는데, 8개월 만에 부모님과 함께 18호 수용소로 옮겨 갔어요. 태어나자마자 한 돌도 지나지 않아서 간 셈이죠. 18호 수용소는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에 위치해 있어요. 초소가 있고, 산 전체에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탄광이었는데요. 그 안에서 오로지 석탄만 캐면서 살아야 했죠. 말 그대로 탄광 노동만 하는 수용소입니다.

– 18호 수용소에는 대체로 어떤 사람들이 수감돼 있었나요?

주로 정치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수감되죠. 경제적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오기는 하지만요. 저희는 정치범이라고 불렸어요. 우리 가족이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악질 중의 악질이다” “종파분자다”면서 비난하곤 했습니다.

– 그렇군요. 18호 수용소에는 몇 명 정도가 수감돼 있었나요?

정확한 숫자는 계산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만, 일단 수용소 한 개 지구에 10개 인민반이 있어요. 인민만 한 개당 40세대 정도가 들어가는데, 한 세대는 적으면 4~6식구, 많으면 12식구로 구성되죠. 지구는 상리동, 수안동 등 여러 곳이 있었는데 우리 탄광 지역에만 13지구가 있었어요.

– 그럼 18호 수용소에만 2~3만 명 정도 되겠네요.

네, 탄광 지역뿐만 아니라 농장 지역은 또 따로 있었어요.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농장 지역도 1, 2, 3반 이런 식으로 구성이 됩니다. 상리동과 수안동, 새마을, 홍마을 등에도 이런 식의 지구가 있어요. 즉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정치범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났으면 바깥세상은 거의 알지 못했을 텐데, 언제 처음 바깥에 나가보셨어요?

저희 가족은 2003년 8월 15일에 정치범 신분에서 해제가 됐어요. 그 때 제 나이가 13살이었는데요. 해제민이 됐다는 건 정치범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지,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여행을 갈수는 있어서, 해제된 그 해 가을 함경남도 단천 영천동에 위치한 금강에 놀러갔습니다. 그곳에 친척들이 살고 있었거든요.

그곳 역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추방돼 모여 살던 데였어요. 일종의 관리소였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죄를 지어서 추방시킨 게 아니라, 암반을 잘 캐는 기술자들, 그곳에선 착암수라 불렀는데 그들을 일부러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철조망은 없고 초소만 있어서 제가 살던 18호 수용소보다는 감시가 느슨했어요. 물론 깊은 시골에 위치한 곳이니 갇힌 생활을 해야 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요.

– 해제민이 되기 전에는 바깥세상이 있었다는 걸 몰랐나요?

네, 전혀 몰랐습니다. 다른 고장이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그 고장들도 우리처럼 살 것이라 믿었어요. 모두가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겠거니 한 것이죠. 제가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이었으니까요.

– 해제민이 됐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기억이 나시나요?

그럼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 많이 설레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행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어요. 기차를 타도 경치를 만끽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기차는 한국처럼 앉을 수 있게 돼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아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 하게 돼 있었거든요. 오죽 사람이 많았으면 기차 ‘빵통(객실)’ 위 전깃줄이 닿는 데까지 사람들이 올라탔어요. 저는 나이에 비해 체구가 굉장히 작았었는데, 그렇다보니 기차 여행 내내 어른들 다리 밑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어요. 그래서 별로 좋은 기억은 없죠. 기차에 내려서도 똑같은 산골 모습만 봐야 했습니다. 평범한 일반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접하지 못했던 것이죠.

– 그랬군요. 태어나서부터 계속 정치범수용소에서 산 셈인데, 훗날 어른이 돼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꿈도 있었나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꿈이었어요. 해제민이 되기 전부터요.

– 이 자리를 빌려서 수용소 사람들 혹은 여전히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얘기를 하자면, 우선 우리 어머니와 형제들이 더 용기를 내서 바깥세상을 보려고 하면 좋겠습니다. 제발 자식들에게 (바깥세상을 보지 말라고) 강요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형제들은 모두 김일성 가족에게 충성하는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북한에 있었을 때 혜산 쪽에서 접한 바깥세상 이야기를 전해줘도 하나도 믿지 않았죠. 오히려 그런 말을 할수록 저를 때렸습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왜 발설을 하냐면서요. 아무 죄 없는 외할아버지가 수용소에 끌려가면서 우리 가족들도 억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한 것이었지만, 그런데도 모두 김일성에 충성했습니다.

북한에선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죄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정치범수용소에 갇히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연좌제는 세계인권선언뿐만 아니라 북한이 서명한 여러 국제 인권 조약들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은 연좌제를 철폐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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