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80년생 젊은이의 ‘북한觀’

“도대체 왜 우리가 굶어야 하는지, 우리나라(북한)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행복이란 것은 막연하기만 했다.”

2002년 10월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 청년 이옥(가명.대학생)씨가 자신의 ’인생유전’과 함께 ’북한관(觀)’을 담은 수기를 11일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에 게재해 눈길을 모은다.

80년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씨는 우선 “지금은 남한에 들어와 개방과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이 모두 북한과 같은 줄 알았다”며 “북한에 살면서 느낀 가장 큰 딜레마는 ’문제는 있는데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만 굶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체제를 비판하고 벗어나려고 애썼겠지만, 언론이 차단당하고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접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며 북한의 폐쇄성을 지적하면서 북한 내에서의 생활상을 전했다.

“어렸을 때부터 북한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황해남도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만 해도 물자가 형편없이 부족하진 않았다”는 이씨는 “인민학교(초등학교) 때 가족이 있는 함경북도 무산으로 올라왔는데 이 때부터 조금씩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했으며 아마 89년 쯤부터 물자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 때부터 계속 나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인민학교 3학년 때쯤 성적이 급격하게 뛰어올라 기쁘기도 했지만, 뛰어난 성적도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군사전문학교에 들어가던 97년에 소규모 장사를 하던 집안이 파산하고 99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했다며 이 시기 ’고난의 행군(최악의 기아)’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대로는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군인이 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로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씨는 중국에 대한 소식을 듣기 시작하면서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99년에 두만강을 넘어 탈북했다.

그는 중국 옌지(延吉)에서 공안의 검문에 피해 구걸을 하기도 하고 목욕탕 때밀이를 하기도 했으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깊숙한 내륙지역인 시안(西安)으로 가게 됐다.

시안에서는 17평(56.1㎡)의 아파트에 13명이 빽빽이 모인 ’북한지역 선교사 훈련소’에 생활했으며 한 달여간 성경공부에 매달리다가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편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되고 말았다.

그는 북송 후 혹독한 구타와 조사에 시달리며 1년 정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 뒤 2002년 4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시장 합법화를 골자로 한 2002년 ’7.1경제개선조치’에 대해 “정말 기대가 컸다”면서 그러나 “당시 우체국에 취직해 8월 1일에 첫 월급을 1천200원 받았는데 시장에 가 보니 쌀 1kg이 500원 가량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경제개선조치 이후 인플레이션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고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경제개선 조치에도 희망을 잃은 이씨는 다시 탈북해 인터넷을 통해 인맥을 찾아 2002년 10월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한국에 와서야 이제 자유를 좀 느끼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대한민국의 자유가 북한에도 있기를 소망하며 통일될 날을 기대한다”면서 수기를 끝맺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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