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3인분석] 우리는 北에서 햇볕정책을 이렇게 보았다

▲ 하역하고 있는 대북지원 물자 <사진:연합>

햇볕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화해와 포용의 자세로 남과 북이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실시한 대북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에 와서 들은 바에 따르면, 햇볕정책의 목적은 북한이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경제가 파탄나고, 주민들이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체제가 변하지 않고 여전히 대결과 긴장으로 나가자, 평화적인 방법에 의거하여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고 경수로 건설지원 등으로 유화정책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단독으로 대북 봉쇄정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햇볕정책을 실시하게 된 동기였다는 설명이다.

당시 남한은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이 안정되게 체제를 유지해 가느냐, 아니면 체제 붕괴로 이어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러한 정세 판단 하에서 햇볕정책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을 보는 북과 남의 시각

햇볕정책은 1998년 4월 3일 김대중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남한 정부는 대북 투자제한을 폐지하고, 투자제한 업종의 최소화를 골자로 하는 ‘경제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남북 비료협상,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방문, 금강산 관광, 그리고 현대의 대북사업을 통한 현금지원 등이 잇따랐다.

햇볕정책은 남한 일각의 지지를 받으며 6.15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촉매제로 활용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시기에 남한 사람들은 곧 통일이 올 것처럼 믿었던 것 같다. DJ가 먼저 평양에 들어갔으니 김정일만 서울에 오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될 것으로 믿은 사람이 꽤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의 햇볕정책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그전부터 김대중을 ‘감람나무가지(평화를 상징)를 든 원수’로 보았다. 90년대 초 김 전 대통령이 독일을 부지런히 오가며 ‘독일 통일론’을 연구하고 있을 때, 북한 특수기관의 자료들은 “김대중이 흡수통일의 야망을 품고 북한을 노린다”며 경계의 제1인자로 점찍었다. 1998년 3월 <노동신문>에는 ‘DJ 정부는 허수아비 정권’이라는 비난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그런데 막상 햇볕정책이 지속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6.15정상회담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남한을 끌어들여 더 많은 지원을 타내 위기에 처한 북한 경제를 회생시키면서 주민들에게는 “받아먹을 때는 받아먹더라도 남조선에 대해 비판적으로, 적대적인 관점에서 받아먹는다”는 2중 전술로 맞선 것이다.

남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는 동안 북한 주민들의 마음은 잔뜩 들떠 있었다. 다들 “이제 장군님이 김대중을 깨우쳐 조국을 통일한다”고 생각했다. 2000년 초부터 남한의 쌀과 비료가 남포항 부두를 메울 때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장군님이 위대하여 남조선에서 갖다 바치는 진상품”이라고 이야기했다.

북한 선전매체는 “장군님의 기상 앞에 무릎을 꿇은 남조선과 미국이 갖다 바치지만,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조금씩 주기 때문에 햇볕정책은 고사정책”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차관(쌀지원)은 외상이나 다름없고 30년 지나면 우리가 통일하기 때문에 안 갚아도 된다”고 했다.

햇볕정책은 조선인민군에 힘을 보탰다

▲ 식량을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북한 주민들 <사진:연합>

2001년에는 식량 50만 톤을 차관형식으로 10년 거치 30년까지 분할방식으로 갚도록 했다. 북한의 동의를 얻어 ‘Republic of korea’ 를 표기한 쌀자루들과 비료포대들이 남포항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와 남한이 한 해에 수십만 톤씩 지원한 식량도 1순위로 군대에 들어갔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한 번에 몇 킬로그램씩 배급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군용차들은 사회차 번호를 달고 운전병들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두로 들어가 쌀을 싣고 빠져나갔다. 주민들은 장교들이나 권력기관 간부들이 빼돌려 장사용으로 다시 장마당에 내놓은 것을 사서 먹어야 했다.

햇볕정책, 김정일에게 일석삼조

김정일은 김대중을 철저히 이용했다. 95-98년 대아사 기간 북한은 내부적으로 사실상 붕괴상태나 다름 없었다. 동네마다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했고, 사람들은 시체를 뛰어넘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 위험한 시기를 김정일은 핵문제와 동해안 간첩침투 사건 등으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높이면서 체제단속을 했고, 급기야 김대중이 집권하면서 기사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후 남한을 이용하여 미국의 대북공세에 방패막이로 이용하면서 한-미 동맹과, 한-일 관계를 이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김정일의 전술은 햇볕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노무현 정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5일자 <노동신문>은 “미 의회조사국 선임연구원 래리 닉스라는 자가 미국-남조선 관계보고서라는 데서 1999년 현대자금이 유입된 후부터 북이 고농축 우라늄 관련장비를 대량구입하기 시작했다느니, 이 자금은 대량살상무기 부품과 자재를 구입한다느니 하며 사실을 날조한다”고 비난하면서, “돈에 무슨 표시가 되어있는가, 그 돈이 거기에 씌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올 초 북한의 공동사설에서도 밝혀듯이 김정일의 전략은 ‘민족 3대 공조론’를 내세워 남한을 미군 축출의 ‘돌격대’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 과거 북한의 계급정책이 그랬듯이 남한의 반미세력과는 동맹하고, 야당을 고립시키고, 미국은 타도한다는 전략이다.

북한에는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땐다’는 말이 있다. 김정일은 남한의 햇볕정책을 ‘일석 3조’로 본 것이다.

한영진(평양 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김영수(함흥 출신 2003년 입국)
김광철(무산 출신 2002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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