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듣보잡’ 외래어에 곤혹…”아메리카노?”

지난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이명옥(55) 씨는 최근 하나원을 수료한 동생의 정착을 돕기 위해 엊그제부터 외래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씨가 동생의 외래어 공부를 직접 가르치게 된 건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이 씨는 하나원을 수료한 직후 한 식당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식당에서 반찬으로 자주 나오는 브로콜리를 가져오라는 주방장의 말을 듣고 브로콜리가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다.


‘주방 관련 물건이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주방을 살펴보니 세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세제 이름이 브로콜리인 줄 알고 주방장에게 가져갔다. 요리에 바빴던 주방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브로콜리를 가져오라는데 세제를 가져오면 어떻게 해요?”


큰소리에 당황한 이 씨는 “처음인데 모를 수도 있죠”라며 화를 내고 말았다. 그 길로 식당을 그만뒀다. 이후 다른 일자리를 구했지만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인 외래어는 그림자처럼 이 씨를 따라다녔다. 이 씨는 외래어를 모르면 한국 사회 정착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씨처럼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으로 외래어에 대한 몰이해를 꼽는다. 탈북자들은 한국 사람들과 대화에서 모르는 외래어가 나오거나 거리 곳곳의 외래어 간판을 보면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예컨대 화장품을 살 때에도 ‘살결물(스킨), 크림(로션), 입술연지(립스틱)’ 등 북한 명칭에 익숙한 탈북자들은 종류도 다양하고 대부분 외래어를 사용한 상품 이름을 이해하지 못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다.


요즘 많이 마시는 원두커피 같은 경우 메뉴를 보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다. 아메리카노를 비롯해 카라멜마키아또 등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들이다. 집 주변에 있는 자그마한 마트에서도 외래어 때문에 물건을 사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례도 많다. 무엇보다 이 씨처럼 취직 후 직장 동료와 상사들이 사용하는 외래어를 이해하지 못해 곤혹스러웠던 경험은 탈북자 대부분이 갖고 있다.


2010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방금옥(52) 씨는 “하나원 수료 후 지역 하나센터 교육을 받던 중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스트레스(스트레칭) 운동을 했더니 몸이 가볍다’고 말했다가 웃음거리가 됐다”며 “외래어에 능숙하지 않으니 비슷한 단어들은 헷갈리기가 쉽다”고 소회했다.


나이가 많은 탈북자일수록 외래어에 대한 어려움을 보다 많이 호소한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20~30대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외래어를 빨리 습득하는 편이다. 하지만 40~50대들은 외래어를 배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직장에서 외래어 때문에 소외된다는 강박감을 가지기도 한다.


외래어를 몰라 회사에서 소위 ‘왕따’가 될까 내심 두려워하는 탈북자들도 있다.


파주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탈북자 황옥녀(47) 씨는 “회사 직원들이 외래어를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위축된다”면서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주변을 멀리하게 되고, ‘왕따’가 되는 것은 순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잘 몰랐지만 회사와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정착 3, 4년 차 되는 탈북자들은 “외래어도 한 번에 하려고 하면 어렵지만 시간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접하다 보면 익숙해진다”면서 “늘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면 결과는 그만큼 빠르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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