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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90년대 대량아사 사태가 시작된 지 10년의 시간이 훌쩍 넘고 있지만 북한주민들의 탈북 행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데일리NK는 중국 선양(瀋陽) 모처에서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국경지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는 NGO활동가 4인을 초청, 재중탈북자 문제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길게는 9년에서 짧게는 4년 동안 탈북자들과 동고동락 했던 이들이 말하는 재중탈북자 실태와 숨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민기(가명) : 42세. 지원활동 9년째. 개인활동가.
박준영(가명) : 40세. 지원활동 6년째. 선교사.
최영식(가명) : 38세. 지원활동 4년째. 한국 NGO 파견 활동가.
김영철(가명) : 36세. 지원활동 5년째. 선교사.
진행∙정리 : 권정현 기자(데일리NK 중국 특파원)
[在中탈북자 10년결산 ①] | 탈북행렬 10년…숫자 줄고 계층 다양 | ||
탈북 루트, 길은 막히고 비용은 늘어
권정현 : 재중 탈북자들의 현재 실태가 궁금합니다. 우선 탈북자들의 탈북 루트를 비롯해서 중국에서 첫발을 내딛는 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이민기: 탈북자들의 탈북 루트도 10년 동안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한마디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죠. 우선 90년대 말까지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에서부터 두만강 하구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모든 지역이 ‘도강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압록강 하구는 강폭이 1백 미터에 육박하기도 하는데 이런 곳에 플라스틱 물통을 껴 안고 도강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이때는 눈앞의 중국 땅을 향해 무턱대고 강을 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원래 북한 국경수비대의 첫번째 임무는 국경을 통해 침입하는 외부의 적을 감시하는 것인데, 1998년~1999년부터 중국으로 도강하려는 북한주민들을 차단하는 것이 첫번째 임무처럼 바뀌었죠.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 국경도시의 주민들은 ‘중국으로 탈북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압록강에 놀러 나온 젊은 청년들이 술 한잔 걸치고 ‘누가 더 수영을 잘하는지 재보자’며 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는 일이 흔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1999년 이후 두만강, 압록강에 일반 주민들의 접근이 통제되기 시작했고,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로 이동하는 일반 주민들에 대한 여행증 검사도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끼고 있는 회령, 무산, 혜산, 만포, 삭주, 신의주 같은 국경도시의 통제가 심해졌습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국경수비대를 정점으로 하는 도강체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북한 당국이 탈북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공식화 하니까 국경수비대에 뇌물을 주지 않고서는 안전하게 도강할수 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국경수비대 군인에게 바치는 뇌물이 시장가격처럼 형성되기 시작했죠.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면 해마다 인민폐 100~200위안씩 상승해서 현재는 1,000위안 정도를 줘야 한답니다. 물론 그것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2006년 11월부터 북한 국경수비대의 부대 재배치가 대대적으로 이루어 졌을 뿐만 아니라,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것은 상관없으니 1명만 체포해도 입당(入黨)시켜준다’는 방침이 국경수비대 군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변방대 초소보다 중국사람 고발이 두려워
박준영: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은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우선 탈북자들이 도강을 못하도록 두만강, 압록강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감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 선양(沈陽)군구 산하 인민해방군이 연변지역에 주둔을 시작했고 압록강에서 북한으로의 도강훈련을 벌였던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북-중 국경지역의 업무는 중국변방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변방대’라는 것이 한국군에는 없는 체계라 설명이 쉽지 않지만, 국경업무와 치안을 전담하는 군부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국의 남쪽 국경과 서쪽 국경의 일부를 인민해방군이 직접 통제해왔던 것과는 비교되는 부분이죠.
탈북자들이 일단 도강에 성공하면 국경지역에서 벗어나 중국 도시로 이동하는 데에 중국 변방대는 큰 걸림돌이 아닙니다. 물론 중국의 두만강 국경지역과 연변지역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에 변방대와 중국 공안의 검문소가 몇 군데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국경수비대의 무장탈영 사건이나 탈북자가 연관된 것이 분명한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변방대의 검문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처음 중국으로 탈북한 탈북자들은 보통 3일에서 일주일씩 걸어서 중국 중소 도시에 들어옵니다. 물론 중국생활에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은 중국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지요.
중국에서 체포되서 강제북송을 경험한 탈북자들은 대부분 중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주위 사람들의 ‘고발’에 의해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탈북자들은 중국 변방대나 공안의 ‘표적수사’보다는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중국 사람들의 ‘고발’을 더 두려워합니다.
도강 직후 운명이 바뀌는 탈북자들
최영식: 처음 중국에 들어오는 탈북자의 경우 중국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압록강에는 혜산과 마주한 장백(長白), 중강진과 마주한 임강(林江), 만포와 마주한 집안(集安)등 중국의 국경도시가 있고, 두만강에는 회령과 마주한 삼합(三合), 삼봉과 마주한 개산툰(開山屯), 남양과 마주한 도문(圖門) 등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탈북자들이 이러한 국경 도시로 들어서기 전에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중국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인신매매꾼인지 평범한 농민인지에 따라 앞길이 달라지는 것이죠. 인신매매를 당하는 탈북 여성들은 대부분 강을 넘은 후 중국의 중소도시로 이동하기 전에 범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또한 이 때 중국사회에 대한 첫 인상과 첫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잠자리, 먹을 것, 국경지역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정보나 교통비등을 제공받으면 중국생활에 연착륙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드문 경우지만 탈북 남성들의 경우 먹을 것과 돈을 위해 중국 농가(農家)에 들어가 강도,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동굴이나 움막을 짓고 숨어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겪는 극단적인 사건·사고는 극히 일부분만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두만강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종종 등장합니다. 연변지역에서는 해마다 한 두 차례씩 산에서 움막을 치고 생활하는 탈북자들이 변방대에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영철: 탈북자들이 북-중 국경지역을 벗어나 중국의 중소도시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자립적으로 생활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신분 문제 때문이죠. 탈북자들은 보통 중국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들로 유입됩니다. 탈북자들에게 조선족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언어가 통하고 민족 정서로 인해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크지만, 조선족 거주 비율이 높을수록 중국 공안의 탈북자 색출 강도 또한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중국의 동북 3성, 특히나 길림성(吉林省)의 경우 해마다 1~2월에 열리는 각급 공안국 연례보고대회에서 항상 북-중 국경문제 및 비법월경자에 대한 안건이 상정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산동성만 가더라도 중국 공안 관계자들이 ‘탈북자’ ‘비법월경자’라는 말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순전히 ‘안전성’만 놓고 따지면 북-중 국경지역과 거리가 멀수록, 조선족 비율이 낮을수록 탈북자들에게는 유리합니다.
하지만 언어문제 때문에 거주지를 마련하거나 일자리를 얻는 일이 불가능하죠. 때문에 다수의 탈북자들이 동북 3성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동북3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늘 중국 공안의 체포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죠.
권정현 : 지난 10년간 재중 탈북자의 실태가 국제사회에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체포와 강제 북송, 북한에서의 처벌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 이동하는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여러분의 활동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민기: 권 기자님께서 그렇게 질문을 던지시니 말 꺼내기가 창피합니다. 사실 별로 하는 일도 없고, 이런 인터뷰 자리에 낄 만한 사람도 못됩니다. 저는 보통 10명 내외의 탈북자들의 생활을 돕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주거지와 생활비를 제공해 주고, 중국어와 컴퓨터, 세계 상식 등을 가르쳐 줍니다.
다만 제가 보호하고 있는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탈북자들의 한국 행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중국에 있는 탈북자 1명을 한국에 보낼 비용과 시간이면, 중국 땅에서 탈북자 5~6명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죠.
솔직히 탈북자 지원사업 분야에서 탈북자들을 한국이나 미국에 데리고 가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탈북자들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보호 받고, 치료 받고, 교육 받는 일에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탈북자 보호…의식주 제공부터 교육까지 포괄
더군다나 저는 특정 NGO나 종교단체의 지원 없이 그냥 혼자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하고 있는데, 근근히 가족들이 먹고 살고 최소치로 탈북자들을 도울 만큼은 됩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거나 보호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 문제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약 10명 정도 인원의 기본 의식주를 해결 해주는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찾아오는 탈북자는 거부하지 않고, 저를 떠나는 탈북자도 붙잡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단 직장을 잡기위해, 혹은 한국이나 미국을 가기 위해 저를 떠난 사람은 다시 받아 주거나 도와주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고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지출이 되면 다른 탈북자의 생활조건이나 교육조건이 열악해지기 때문이죠. 제가 이 일을 시작한지 내년이면 10년인데, 지금까지 만난 사람은 400명이 넘는 것 같고, 제가 돌보던 사람은 7~80명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중에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 사람도 있고, 한국에 정착한 사람도 있고, 미국까지 간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소식이 끊긴 사람이 훨씬 더 많죠.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합니다.
저는 가능한 탈북자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실제 그들의 형편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탈북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생활의 자립력을 키우는 것 입니다. 역사를 길게 보면 언젠가는 김정일 정권도 망할 것이고, 북한도 개혁개방의 길에 나설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에게도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오기 전에 굶어 죽은 사람, 아파서 죽은 사람, 월경하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이 모두 얼마나 불쌍합니까?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있은 일은 한 사람의 탈북자들이라도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맞이 할 때까지 살아 남고 버티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요?
박준영: 저는 중국 조선족 교회와 연계를 갖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 활동과 양육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선족 교회에 찾아오는 탈북자들에게 쌀, 중고 의류, 의약품, 성경 공부와 관련된 서적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 중 신앙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주지를 제공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합니다.
대부분 탈북자들은 식량과 옷, 중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교회를 찾습니다. 탈북자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면 본격적인 성경공부를 희망하게 됩니다. 물론 많은 탈북자들은 교회의 물질적 도움 때문에 교회와 연계를 갖고 있지만 그 중에는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탈북자들에 대한 양육 프로그램이 끝나면 그들이 희망하는 길로 나서도록 돕고 있습니다. 북한에서의 사역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탈북자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한국이나 미국 행을 원하는 탈북자들은 도움이 될만한 분들을 소개 시켜주고, 사역을 위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탈북자들의 경우 좀 더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합니다.
최영식: 저는 단기적으로는 탈북자들이 안전하게 중국 현지 적응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김정일 정권 이후 북한 사회의 재건 과정에서 의미 있게 활동할 수 있는 인재 풀과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창한 목표 만큼 실제 활동력이 뒷받침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민기 선생님 말씀처럼 문제는 ‘돈’입니다. 제가 소속된 단체는 재정 상황이 뻔하기 때문에 매달 제가 탈북자 지원활동에 쓸 수 있는 비용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돌볼 수 있는 탈북자는 한번에 5명을 넘기 힘듭니다.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제공하고 중국어·컴퓨터·일반 상식 등을 가르칩니다. 교육의 기본 방향은 북한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김정일 정권 이후 북한 사회의 발전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탈북자 1인 생활비 월 15만원…의료비가 부담
김영철: 다른 분들은 구체적인 지원대상을 정해놓고 지원활동을 하시지만 저는 범위를 좀 넓게 잡고 일하는 편입니다. 일단 일선교회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국과 중국 사이의 원만한 연계에 힘을 쏟으면서 탈북자들에 대한 양육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교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교회의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을 만나면서 정보도 교류합니다. 중국에 있는 여러 조선족 교회에서 탈북자들에게 배포하는 서적, 의약품, 의류 등이 부족하지 않게 조달하는 일을 하면서 한국 교회에서 방문하시는 단기 선교팀과 탈북자들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있습니다.
권정현 : 모든 분들께서 탈북자 지원활동에서 돈 문제를 계속 강조하시는데, 실제 중국 현지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어느 정도입니까? 경험에 비추어 탈북자 지원활동에 필요한 구체적 액수에 대해 설명 부탁 드립니다.
이민기: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돈’입니다. 물론 한국정부나 국제사회가 평양에 퍼주는 돈에 비하면 ‘껌값’이겠죠. 한국 원화로 설명하자면 연길, 단동, 심양, 통화 같은 도시에서 탈북자 1인 혹은 1가족이 비교적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의 월세는 최소 7~8만원입니다. 여기에 식비와 주거에 필요한 공과금이 3~4만원 이구요. 비상 연락을 위해서는 핸드폰도 필요하고, 중국어 학습 교재까지 하면 돈이 또 들죠.
한 사람의 탈북자에게 최소한의 안전이 담보된 의식주를 제공하려면 한국 돈으로 매달 15만원은 소요됩니다. 탈북자들의 은신처를 7~8개 운영하려면 고정비용만 100만원이 넘습니다. 고정 비용을 줄이려고 집 한 채에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함께 살게 하면 반드시 사고가 생깁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고, 중국 공안이 비정기적으로 호별방문을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기죠. 그래서 가능한 저는 탈북자 1인 1주거 원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탈북자들의 기본 생활비 지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정작 의료비용이나 교육비용 등이 부담스럽지요. 탈북자들 중 다수가 심각한 영양부족과 소화기 계통의 질환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은 생활물가 대비 의료비가 아주 비싼 나라예요. 보호하고 있는 탈북자가 지속적인 병원치료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수 십만원이 그냥 깨집니다.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몇 십만원은 큰 돈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인건비와 물가가 낮은 중국에서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 가족의 한달 생활비가 월세 비용까지 해서 50만원이 안됩니다. 그러나 탈북자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매달 150만원이 넘는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정말 큰 돈이죠. 동북 3성의 대학교수 월급이 5~60만원 수준이니까요.
박준영: 제가 매달 탈북자 지원활동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한국 원화로 200만원이 넘습니다. 탈북자 한 사람이 실제로 먹고 입고 쓰는 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탈북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기본 생활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죠.
탈북자들이 최소한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의료, 교육, 문화생활이 필요합니다. “배고파서 중국까지 왔으니, 세 끼 밥이나 먹고 옷이나 걸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탈북자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탈북자 1인에 대한 보호나 양육사업을 전개하려면 거주지,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 건강을 개선하기 위한 의료지원, 생활비, 교육비 등이 필요합니다.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다 보면 각 개인에 대한 지원범위가 자꾸만 넓어지게 됩니다. 지원 액수야 미리 정해 놓고 원칙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지원범위를 미리 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탈북자에게 은신처는 제공하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은신처는 제공할 수 없지만 성경책과 중국어 학습 교재는 제공한다’거나 ‘중국에 있는 동안은 지원하지만 북한으로 송환될 경우에는 모른 척 한다’는 식의 원칙이 말이나 됩니까?
때문에 탈북자 한 사람에 대한 보호와 양육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거의 무한정으로 돈이 들어가지요. 탈북자가 중국을 떠나 한국이나 고향으로 가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이상, 한 사람의 탈북자와 인연을 맺게 되면 거의 무한정 지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양육했던 탈북자의 경우 1년에 700만원이 지출된 적도 있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