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탈북민 500여 명의 월경(越境)을 도운 중국인 탈북 브로커에게 이례적으로 난민 인정서가 발급됐다. 이후 수많은 매체들이 그의 사연에 주목했고, 그에게는 ‘중국인 쉰들러’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쉰들러’라는 별명은 그와 썩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으로부터 한국 체류자격을 부여받은 지 약 3개월이 흐른 지난 2일, 일거리를 찾기 위해 잠시 서울로 올라온 투아이롱(塗愛榮·56) 씨를 만났다. 수척한 얼굴의 그에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순조롭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2004년부터 탈북민들을 도왔다는 투 씨. 그의 지난 15년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평탄했던 삶에 제동을 건 사건은 지난 2007년 벌어졌다. 당시 그는 탈북민들을 데리고 동남아 제3국 국경으로 가다 중국 공안(公安)의 검문에 걸려 체포돼 약 한 달간 구금됐다 풀려났다. 이후 그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당했다.
그러다 2008년에는 중국 안전국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이후 다시 체포돼 6개월간의 구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9년 중국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 받아 풀려났지만, 또 다시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중국을 떠났다. 동남아 제3국에서의 도피 생활 끝에 라오스 국적을 취득했으나 라오스 주재 중국대사관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신변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그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6년 제주에 당도했다. 처음에는 잠시 거쳐 갈 목적이었으나 중국은 물론 라오스로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결국 한국에 정착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난민 신청 2년여 만에 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 가족을 제주에 데려와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많다.
평범하게 중국과 라오스 국경을 오가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북한 사람들의 탈출을 돕는 일에 마음이 계속 이끌렸다. 결국 지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당장 내일을 걱정하게 됐지만, 그는 ‘탈북민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북한사람들의 탈출을 돕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4년부터 시작했다. 중국에서 만난 조선족이 ‘친척 친구들 중에 라오스에 놀러가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국경을 넘을 자격이 없다. 그래도 건너갈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봤다. 나는 중국과 라오스를 오가며 무역을 해 라오스로 넘어갈 수 있는 작은 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 세 번 국경을 넘도록 도와줬는데, 마지막 세 번째에야 그들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 당시 중국 쪽 호텔에 20명 정도 되는 사람이 한 달이 넘도록 그곳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 번에 나뉘어서 몇 명씩 라오스로 넘어왔는데, 마지막 세 번째에 탈북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후에 이 일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중국 쪽 호텔을 자주 오가던 나에게 조선족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내가 중국인이면서 라오스도 잘 알 것 같으니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친분을 쌓으려 했다. 신뢰가 생기자 그 조선족이 국경 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잘해준 사람이고, 남자들끼리의 의리도 있지 않나. 또 나에게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도움이 점차 빈도가 높아졌고, 이 일이 본업을 대체할 정도가 된 것인가.
“아니다. 자주 탈북을 도왔지만, 내 본업을 버리지는 않았다. 보통 (브로커들에게) 열흘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 다음 일정을 짰고,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지인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했는지 설명해달라.
“일단 중국 윈난(雲南)성 변경까지 탈북민들을 차로 데리고 온 다음 걸어서 산을 넘도록 했다. 산길은 중국인 지인이 안내했고, 그동안 나는 차를 끌고 산을 빙 둘러 국경 너머로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산을 내려오면 다시 차에 태워 정해진 장소에 데려다주는 일을 했다. 윈난성 시내에서 변경까지 가는 것도 순탄치 않다. 그곳에서 마약 밀매가 많이 이뤄져 많은 검문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탈북민을 태우고 갈 때마다 차 두 대를 동원했다. 한 대가 앞에서 1시간 먼저 출발해 가면서 뒤따라가는 나에게 중간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알려줬다. 뒤따라오는 차가 (검문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탈북 과정에 직접 관여하면서 어떤 생각 또는 감정이 들던가.
“처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탈북민들과 말도 별로 섞지 않았다. 그저 차에 태우고 정해진 장소까지 가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을 데리고 중국에서 빠져나오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차츰 그들과 말도 하고 이런 저런 상황도 알게 됐다. 이 사람들이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동정심과 애정이 생겼다. 내가 그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생각도 들면서 보람과 성취감도 느꼈다.”
-중국에서 체포됐을 때의 상황은 어땠나.
“2007년 4월쯤 탈북민 6명을 태우고 변경으로 갔다. 새벽 2~3시쯤이었다. 앞에 먼저 출발한 차가 있었는데, 그 차가 지나간 20~30분 사이에 중국 공안이 치고 들어왔다. 차가 포위됐고 나 역시 붙잡혔다. 중국 구치소에 한 달 넘게 구류됐다가 벌금 8만 위안(약 135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물론 내 개인 돈으로 냈다. 풀려난 이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또 한국 쪽 브로커에게 연락이 왔다. 나에게는 (탈북민들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위험하니) 직접 하지는 않고 지인들에게 연결해주는 정도로만 했다.”
-중국 당국이 굉장히 주시했을 텐데.
“풀려나고 나서는 중국 안전국이 나를 계속 추적했다. 2008년 4월쯤 집 전기계량기를 점검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온 적 있었다. 이상해서 이웃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은 안 왔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서 5월에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데 중간에서 검문을 당했다. 아예 작정하고 신분증 내놓으라고 하더니 나에게 검은 천을 씌우고는 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서 대놓고 이야기하더라. ‘중국 안전국에서 나왔다. 우리가 왜 왔는지 알지 않냐’고. 그러더니 자신들과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만약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위협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호텔에 사흘간 갇혀있다 풀려났다.
-안전국이 제안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안전국의 제안은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탈북민 운송 정보를 주면 안전국에서 탈북민들의 신상을 살펴보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빼내겠다는 것이었다. 검문하는 것처럼 차를 세울 테니 나는 도망가라고 했다. 그런데 안전국이 데려간 탈북민들이 북한에 보내져도 목숨이 위험하고, 필요한 정보를 빼내기만 하더라도 이후에 생명이 보장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안전국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2008년 8월 또다시 체포됐다.
-당시 수입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제 한국 법무부는 탈북민을 안내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기 때문에 난민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어떤 입장인가.
“한국 정부가 전후상정을 잘 모른다. 중국 윈난성 도시에서 라오스까지 1인당 500달러(약 56만 원), 쿤밍에서 태국 방콕까지는 1000달러(약 113만 원)를 받았다. 받은 돈은 거의 탈북민을 위해 썼다. 이 돈이 과연 큰돈인지는 그쪽 상황을 아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내가 정말 돈을 밝혔고 양심을 팔았다면 중국 안전국과 손잡았을 것이다. 안전국에게서도 돈을 받고, 브로커에게서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에 갈지언정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국 안전국은 ‘왜 협조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민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이다. 내가 돈을 받는 대가로 그들은 목숨을 내놓게 된다’고.”
-여전히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은 인신매매나 강제북송 위험에 처해 있다. 해외 탈북민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 모두 데려올 수 있다. 10만 명이든 100만 명이든 한국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데려올 수 있다. 나 같은 사람도 탈북민을 탈출시키는 데 한국 정부는 탈북민들을 수용할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국에서의 삶이 여의치 않더라도 중국에 갈 수 없고 라오스에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게 당장 앞에 놓인 현실이다. 한국 정부는 5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을 구출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데도 여러 불편사항들을 만들어놓고 있다. 나는 난민으로 인정받았지만, 내 아내는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15살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도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답답함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신이 우리 가족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열심히 일해 잘 적응하고 살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어렵게 이곳에 온 탈북민들도 잘 정착해서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