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인질극, 우리사회 ‘도덕적 패혈증’을 경계한다

▲ 25일 아프가니스탄 경찰들이 탈레반에게 살해되어 가즈니주에서 발견된 한국인 인질의 시신을 옮기고 있다 ⓒ연합

봉사활동을 위하여 아프카니스탄에 입국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 무장조직에 의해 납치되어 그 중 한명이 7월 25일 살해되었다.

또 26일까지 여러 번의 “마지막 협상시한들”이 지나고 또 다른 “마지막 협상시한”이 설정되면서 이 와중에 탈레반 무장 조직 내에서 강경․온건파의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는 혼란스러운 외신보도는 ‘인질극’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질극의 딜레마인가?

인질극의 논리구조

매장의 고객을 붙들고 벌이는 은행의 인질극에서부터 테러조직의 인질극에 이르기까지 그 공통점은; 첫째, 인질범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 둘째, 무고한 인질들의 생명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도덕적, 법적, 사회적 요구가 매우 강하지만, 인질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 셋째, 또 다른 인질극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인질범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기도 힘들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인질범 역시 전혀 다른 방향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선 인질이란 ‘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협박의 유효한 수단이지만, 모두 살해되는 순간 협박수단도 동시에 사라질뿐더러 그 자신의 생명도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탈레반 테러조직의 은신처를 포위한 연합군의 움직임을 인질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인질들에게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납치범들 역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질범의 요구를 완전히 들어준다거나, 아니면 미국처럼 아예 무시한다면 ‘인질극의 딜레마’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국가들의 경우 인질범은 인질의 몸값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에서, 반대로 인질범과 협상하는 당국자는 최대한 낮추는 방향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려 들 것이다.

여기서 인질범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협상당국자는 타협의 범위를 제한하는 많은 원칙들로 무장해야 하고, 이러한 원칙은 사회적 합의를 전제해야 한다. 이처럼 많은 원칙의 갑옷들은 인질범의 요구가 쉽게 먹히지 않게 만들어 같은 종류의 인질극이 재연될 가능성을 줄여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인 납치조직이 요구하는 탈레반 죄수 석방에 대하여 아프카니스탄 정부가 거부하는 데에 많은 한국인들이 안타까운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올해 초 탈레반에게 납치된 한 이탈리아 언론인을 석방하기 위해 교환된 탈레반 죄수 5명중의 하나였던 다둘라(Dadullah)는 영국의 채널 4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론 납치는 매우 성공적인 정책이며 나는 모든 무자헤딘에게 국적을 막론하고 발견되는 모든 외국인을 납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탈리아인 인질 때’와 같은 거래를 할 것이다.”

인질극의 또 다른 현실

그러나 인질극은 위에서 원론적으로 기술한 딜레마만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테러행위에 대처하는 사회적 합의가 결여될 경우, 이해와 이념을 달리하는 사회의 여러 계층은 납치행위 자체는 야만적 행위라고 규탄할지 모르지만, 그 원인과 대응방식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해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다. 이번 탈레반의 납치사건에서도 이런 현실이 분명히 노정되었다.

즉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한국의 아프카니스탄 파병에 있다고 보아 한국군의 즉각 철수를 주장하거나, 아니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두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또 일부 시민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을 기독교의 지나친 선교행위에서 찾아 인질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 하나의 정상국가가 범죄조직의 행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과 인질들의 생명이 최우선이라는 타협론이 갈등을 벌이기도 한다.

이때 테러행위라는 직접적인 원인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수많은 필요조건 중의 하나가 진정한 원인으로 부각되는 현상, 그리고 그것이 좀더 심층적이고 진보적인 판단이라는 선입관이 한국에도 널리 퍼져 있다. 결국 누가 가해자가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도덕적으로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이 흐려지고 인질범들과의 협상은 단지 현재의 질곡을 모면하는 방향으로만 흐르게 마련이다. 필자가 “도덕적 패혈증”이라고 부르고 싶은 현상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과 같이 국내가 아니라 국제적 분쟁지역에서 일어난 납치 행위의 경우 피해국마다 인질극에 대응하는 원칙과 방법이 달라 테러행위에 국제적으로 합의된 대응원칙을 세우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인다. 이런 국내․외적 상황은 납치범들에게는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하여 탈레반 조직들은 피랍자 가족들의 절박한 상황을 비롯 국내․외 언론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5가지 이성적 대응방식

아마도 이런 사태에 대처하는 완벽한 매뉴얼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인질극의 논리적 구조를 볼 때, 비록 인질극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대응방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첫째, 테러행위가 일어났을 경우, 그 책임을 테러조직에 국한시켜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이 이슬람국가인 아프카니스탄에서 원주민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였다는 것 자체는 도덕적으로 결코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슬람교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지도 모르는 아프카니스탄의 극도로 불안한 치안상태를 고려할 때, 정부의 입국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안전대책을 소홀히 한 점은 ‘현명하지 않았다’라고 비판될지 몰라도 현명하지 못한 행위가 테러 발생의 원인으로 낙인 찍혀서는 결코 안 된다. 이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비이성적 행위다.

둘째, 인질납치범들이 인질을 마구 살해하거나 납치극을 장기간 끌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물리적 조치를 초기에 빨리 실행해야 한다. 즉 비문명화된 방법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초적 대응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셋째, 인질극의 또 다른 직접 피해자인 가족들에게 사회는 위로, 격려와 함께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상황설명을 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허용되고 가능한 모든 조치를 하여야 하지만, 인질범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고 해서, 또 인질범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인질의 생사가 갈리는 것이 아님을 기왕의 사례를 갖고 이해시켜야 한다. 하나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 인질범들은 납치극을 끝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요구를 강요하기 위해 인질 중 일부를 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협상당국자의 원칙 없는 대응은 인질범들의 행동 역시 원칙적으로 예상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넷째, 사회는 앞에서 언급한 많은 원칙에 대한 합의를 통해 인질범의 요구가 절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이슬람 테러행위의 주표적임으로, 한미동맹이 한국인에 대한 테러의 근본원인이고, 따라서 한미동맹을 해체․약화하는 것이 테러행위를 근절할 수 있는 조치라고 보는 단순 삼단논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 지를 납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지는 납치인질극은 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한미동맹은 북한의 테러지원 폭력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국 사회는 한국인들에게 테러행위가 빈발할 수 있다는 점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전에 미리 예방․경고하는 전문기관, 전문가들을 양성․대처해야 한다. 국민들 역시 분쟁지역에서의 테러예방 행동방식을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 즉 한국인의 행동반경은 분쟁지역에까지 급속히 확대되어 세계화하였지만, 행동방식은 아직도 테러에 대하여 매우 안전한 국내 상황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또 다른 인질극

다른 한편, 인질극은 아프카니스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인질극이 내포하고 있는 딜레마와 대응원칙은 구조적으로, 즉 상황만을 바꾸어 볼 때 김정일 정권과의 여러 협상, 북한 핵, 납북자와 국군포로, 서해교전의 원인과 관련된 논란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할지 안할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핵무기 개발이 공개되고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북한에게 핵무기란 한편으로는 협상을 통해 포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지만’ 동시에 납치된 인질처럼 보유하고 있을 때만이 물질적, 정치적 대가를 끌어낼 수 있는 협상수단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여기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대북정책의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으며, 또 북한의 불법적, 비인도적 행위를 ‘이해해 주려는’ 세력의 행태가 얼마나 남북관계의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는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핵 폐기와 관련된 6자회담에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고 “진실의 순간”을 기다리자는 이종석 전통일부장관의 견해와, 이른바 “한반도 평화비전”이라는 한나라당의 신대북정책이 그것이다.

탈레반의 인질극과 현재 남북 간의 여러 현안에 대한 구조적 동일성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상상력의 부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원칙이 사라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기준이 흐려지면 사회는 도덕적 패혈증에 걸리고 판단은 혼미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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