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에서 한국 가입까지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이 결국 한국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한 공식 참여를 불러왔다.

북한의 1차 핵실험과 대량살상무기(WMD) 및 관련 장비의 반출.입, 장.단거리 미사일의 잇단 발사로 가입 시기를 저울질해오던 정부가 이번 2차 핵실험을 계기로 전면 참여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PSI는 미국 대외정책의 대전환을 가져온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WMD 차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잉태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논의의 확산에 불을 지핀 것은 2002년 12월 스커드 미사일 15기를 감춘 채 예멘으로 향하다 적발된 ‘북한 서산호 사건’이었다.

당시 스페인 해군은 미국의 정보 제공으로 서산호를 검색해 전모를 밝혔지만 서산호가 합법적인 신용장을 갖고 있었던데다 예멘 당국이 미국에 강력항의하면서 무사 통과됐고, 미국은 이 과정에서 스페인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면서 WMD 차단을 위한 효과적인 국제 공조체제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의혹에 의한 제2차 북핵위기로 핵물질 또는 핵무기의 반출.입 문제도 미국에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3년 5월 폴란드 크라코우 연설을 통해 그 필요성을 공개 천명하면서 PSI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창설 당시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11개국의 공동 발의에 6개국이 가세, 17개국에 불과했던 PSI 가입국은 현재 94개국으로 확대됐으며 우리나라는 95번째 참가국이 된다.

한국이 PSI에 전면가입하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미국은 PSI가 출범하던 2003년 한국에 정식참여를 공식 요청한 이래 수차례에 걸쳐 동참을 요구했으나 당시 남북화해를 기조로 하던 참여정부는 북핵문제와 남북관계를 감안해 이를 거절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비난하는 북한 인권문제를 놓고 당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미국의 요구가 계속되자 정부는 2006년 1월 한미군사훈련에 WMD 차단훈련을 추가하고 PSI 활동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 한편 PSI 역내 차단훈련에 참관단을 보내는 등 제한적 참여를 결정했다.

여전히 역내.외 차단훈련시 물적지원과 정식참여에 유보적이던 참여정부는 2006년 10월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전면참여에 대한 안팎의 요구에 직면했으나 기존 남북해운합의서가 `무기 및 그 부품의 운송과 평화, 질서, 안전보장을 해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되지 굳이 PSI에 정식참여해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이전과는 다른 대북정책을 구사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현 정부가 한미동맹 복원을 기치로 내세운데다 금강산 관광객 총격사건, 북한의 군사분계선(MDL) 통행 차단 조치, 대남위협 증가 등으로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PSI 전면가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어갔다.

그러다 북한이 지난 3월 장거리 로켓 발사를 공언하자 PSI 전면가입 방침이 공식화되고 정부는 발표 시점만을 남겨뒀다.

`4.5 로켓 발사’ 직후 전면가입을 선언하려던 정부는 그러나 현대아산 직원 억류라는 돌발사태에 직면하면서 한 때 가입 시기에 대한 혼선을 빚기도 했지만 이번 `5.25 핵실험’이 강행되자 바로 다음날 전면참여라는 카드를 미련없이 공개했다.

이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거듭된 도발 자제 촉구를 무시하고 있는데다 한국 정부의 화해 제스처에도 강경 일변도로만 일관해 더는 `수사’에 의한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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