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쇼르 마부바니 “美, 中-이슬람 관계가 지구촌 운명 좌우”

(동아일보 2006-01-17)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남단에 붙어 있는 초미니 국가 싱가포르. 한국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이 소국(小國)은 국제무대를 주름잡는 노련한 정치가(statesman)를 여러 명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콴유(李光耀) 초대 총리에 이어 요즘 세계적인 정치 사상가로 떠오르고 있는 키쇼르 마부바니(57)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학장. 마부바니 학장은 극심한 금융위기 와중에 아시아의 부활을 예언한 저서 ‘아시아인들은 생각할 수 있는가’(1999)를 펴내 일약 세계 지성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엔 미국의 세계 평화 파수꾼 역할 회복을 주장한 저서 ‘순수의 시대를 넘어서’를 출간해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아시아의 토인비’ ‘신유교 사상의 막스 베버’라고 불렀다. 2005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은 그를 13일 싱가포르 현지에서 만나봤다.

―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미국의 역할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미국이 자신을 위협하는 양대 세력과 어떤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가에 따라 세계는 평화의 시대를 누릴 수도, 전쟁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 양대 세력은 어디를 말합니까.

“중국과 이슬람 세계입니다. 미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미중 관계도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 미중 관계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 아닌가요.

“정부와 사회 수준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관계는 우호적입니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는 다릅니다. 지난해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중국의 정치개혁 필요성을 언급했을 때 중국 내에서는 반미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민주주의 압력으로 인해 냉전 후 러시아처럼 대혼란에 빠지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중국은 미국과 어떤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까.

“중국은 미국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전후 독일과 일본처럼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기를 원합니다. 바로 ‘장쩌민(江澤民)식 세계질서’이지요. 군사강국이 되는 것은 현재 중국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봉쇄(containment) 정책입니다. 중국이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 경제성장의 ‘열매’를 나눠 주고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미국 견제용입니다.”

― 중국 이슬람과의 갈등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부시 대통령이 악화시킨 측면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정책 변화는 좀 더 구조적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타적인 이유에서든 국가 이익 때문이든 미국은 다른 나라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 관심을 갖는 ‘온정적(compassionate)’ 외교노선을 견지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미국은 변했습니다. 국내 정치적 고려가 외교정책을 좌우하게 된 거죠. 세계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데 미국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나라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신경 쓰지 않게 됐습니다. 과거 미국이 ‘특별한(extraordinary) 나라’였다면 지금은 ‘보통(ordinary) 국가’가 됐습니다.”

― 그런 미국의 외교정책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고 있습니까.

“단기적 이익에 매달리다 보니 ‘이중 잣대’가 여기저기서 발생합니다. 정책의 일관성을 잃게 되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미국은 ‘와일드카드’가 됐습니다. 가장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가진 미국이 국제정치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됐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 미국의 6자회담에 바탕을 둔 북핵 외교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유엔에서 보면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 다음으로 쿠바와 미얀마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폐쇄된 사회를 다루는 최악의 방법은 ‘고립(isolation)’입니다. 반면 최선의 방법은 ‘포용(engagement)’입니다. 소련도 미국의 포용 정책 때문에 결국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 요즘 중국만큼 주목을 받는 나라가 인도입니다. 인도의 성장 가능성과 국제적 위상을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미국은 인도의 부상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를 중국 견제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도는 미국의 중국 견제 도구로 활용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도는 미국 중국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도는 일본과 다릅니다. 일본이 중국과의 갈등을 불사하고 미국과 좀 더 가까워지려는 반면 인도는 독립적인 외교 능력을 확보한다는 전략입니다.”

― 한국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야스쿠니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일본은 ‘존재론적 위기(existential crisis)’를 겪고 있습니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은 줄곧 서구 쪽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아시아 주변국의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아시아의 세기’가 오고 있으니까요. 일본은 이제 서구 클럽의 회원이 될 것인지 아시아의 회원이 될 것인지 근본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입니다.”

― 지금이 ‘아시아의 세기’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냉전시대 몰락과 함께 서구적 가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역사의 종말’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역사의 귀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방 국가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10%도 되지 못합니다. 2050년 세계경제 4대 강국이 될 나라(중국 미국 인도 일본) 중 3개는 아시아에 있습니다. 중국-인도, 중국-베트남, 인도-파키스탄 등 아시아의 오랜 앙숙들도 화해 무드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500여 년 만에 세계 역사의 중심축이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 최근 아시아권을 휩쓸고 있는 한류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나요.

“한류는 ‘아시아 르네상스’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학창시절 저는 중국이나 아시아 역사가 아닌 영국 역사와 셰익스피어 문학을 배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서구의 이미지보다는 아시아와 자국 문화에 더 친숙합니다.”

◎ 키쇼르 마부바니 약력
△1949년 출생
△1970년 싱가포르 국립대 철학과 졸업
△1976년 캐나다 댈후지대 철학 석사
△1982∼84년 미국 주재 싱가포르 부대사
△1985∼89년 유엔 주재 싱가포르 대사(1차)
△1991∼92년 하버드대 국제관계센터 방문교수
△1998∼2003년 유엔 주재 싱가포르 대사(2차)
△2001년 2월, 2002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2회 역임
△2004년∼현재 싱가포르 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학장
△주요 저서: ‘아시아인들은 생각할 수 있는가?(Can Asians Think?)’(1999·국내 번역본 미출간), ‘순수의 시대를 넘어서(Beyond the Age of Innocence)’(2005·국내 번역본 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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