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방북..새 출발점에 선 북.미

“길고도 험한 길의 첫 걸음을 시작한데 불과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4일 전격 방북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회동, 그리고 5일 오전 여기자 석방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행보를 지켜본 정부 고위소식통은 성급한 판단과 기대를 경계했다.

역사적 의미가 크긴 하지만 ‘김정일-클린턴 회동’만으로 20년을 끌어온 북핵을 둘러싼 고도의 외교방정식의 해법이 신속하게 마련되기 힘들 것이라는 체험적 평가인 것이다.

실제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행으로 북한과 미국간 피할 수 없는 대좌를 위한 우호적 국면이 조성된 것은 사실인 듯 보이지만 당장 양측간 ‘빅딜’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며 공식적인 대화마저 시작되려면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북한측이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 도착부터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동, 그리고 신속한 여기자 ‘사면’조치를 단행한데서 보듯 미국과의 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과시했지만 미국 정부는 여전히 ‘여기자 문제와 정치 현안 분리 원칙’을 확고히 하고 있다.

로버트 우드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4일 정례 브리핑에서 “변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특히 필립 골드버그 대북제재 조정관의 러시아 방문 결과를 언급하면서 “골드버그 조정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 이행을 위한 가능한 한 최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곳에 갔다”면서 “이런 노력들은 계속될 것이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설정한 대화의 조건인 ‘비가역적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조치가 가시화되기 전까지 미국의 대북 제재 행보가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그동안 뉴욕 채널을 통한 북한과 미국간 접촉에서 여기자 문제와 정치현안에 대한 분리처리 여부를 놓고 양측은 치열한 신경전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은 비가역적 조치를 전제로 핵문제 뿐 아니라 미사일과 인권 등 제반 문제를 향후 협의에서 다룰 수 있는 상황에서 포괄적 패키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북.미 양자 대화가 가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6자회담 틀내에서 진행돼야함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의 문제점 등을 강조하면서도 북.미 양자 협상에 대해서는 적극성을 드러냈다는 게 외교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실제 북한의 의중은 클린턴 전 대통령을 초청하고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북한과 미국 사이에 ‘공동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해 폭넓은 의견교환을 했다’는 북한 매체의 발표를 보면 실감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북.미 양측은 6자회담의 틀이라는 협상 방식은 물론 협상이 개시됐을 때 논의해야 할 의제를 놓고도 치열한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이미 권력서열 2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지난달 15일 이집트에서 열린 제15차 비동맹운동(NAM) 정상회의에 참석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북.미 양자협상만을 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는 북한과 양자대화를 할 수 있다는데 열린 입장을 갖고 있으나 그것은 6자회담 등 다자회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 문제는 6자회담의 틀이 다양한 형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북.미간 절충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개입 등을 통해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차 북핵 위기 초기였던 2003년 봄 양자냐, 다자회담이냐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충돌했을 때도 중국을 사이에 둔 3자회담이 한차례 열린 뒤 그해 8월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6자회담이 운영됐었다.

게다가 6자회담을 하면서도 미국과 북한은 ‘6자회담의 틀’이라는 명분 하에 양자회담을 해왔고 이를 통해 주요 현안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도 했다.

결국 대화를 위한 전제조건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비가역적 비핵화’ 조치와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놓고 양측이 절충점을 찾을 수 있는 지가 관건이 되는 셈이다.

외교소식통들은 ‘비가역적 비핵화 조치’의 내용은 2005년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에서 규정된 조치를 북한이 구체적으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모든 핵 프로그램의 포기’를 선언하고 복구중이던 불능화 조치를 다시 확실한 방법으로 불능화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의 경우 북한이 위성발사라고 주장하는 장거리 로켓 발사로 인해 취해졌던 국제사회의 제재 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석하기는 쉬어도 실현하기 어려운’ 북한과의 협상에서 적절한 수준에서의 타협을 실제 현장에서 구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의 폐기와 이에 상응해 미국이 제공하려는 관계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 평화체제 문제 등은 어떤 논리로 배열하고, 어떤 방식으로 협상하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도 양측의 수뇌부가 어떤 의지를 갖고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향방이 결정날 것이라는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서울의 외교소식통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냉철한 외교전쟁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다”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시의적절한 전략과 전술은 이제부터 구사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관련국 사이에 긴밀한 협의가 상당기간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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