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의 ‘대단한’ 착각 3가지를 보자

▲ 힐 美 국무부 차관보 ⓒ연합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2․13 북핵합의를 김정일의 일방적 완승으로 끝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북한의 2002년과 2007년의 핵 현황을 비교해 보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영변의 핵시설은 봉인되어 있었고, 북한은 NPT(핵비확산) 체제 하에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5년간 영변의 원자로를 가동하고 재처리를 통해 북한은 약 50kg 정도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게 되었고(크리스토퍼 힐의 미 의회 청문회 증언), 핵실험을 통해 사실상 핵보유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북핵합의를 통해서 장기적으로 폐기하려는 대상이 바로 이 5년 사이에 북한이 만들어낸 핵물질이라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제는 2차 북핵위기의 도화선이었던 고농축우라늄의 존재에 대해서도 미국 스스로 확신을 접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난 5년간 무슨 이유로, 무엇을 위해서 북핵 위기를 ‘불러일으켰는지’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굳이 비유한다면, 안하무인의 범죄 집단을 자극하여 양인을 인질로 잡도록 방치하고, 이제야 인질을 풀어달라고 협상하며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100번 양보를 해서, 2차 북핵 위기를 ‘엎질러진 물’이라고 인정하고, 북한의 핵보유라는 현실을 원론적이고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실현 가능하고, 평화적 방법을 통하여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도 인정하자. 그렇다면 이번 2․13 북핵합의는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까?

크리스토퍼 힐의 잘못된 계산법 3가지

필자는 2월 27일 미 의회에서 열린 외교위원회의 청문회 기록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미국 의원들은 크리스토퍼 힐의 이번 베이징 합의를 높게 평가하였고, 그의 인내심과 외교적 수완에 경의를 표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외교관 특유의 겸양의 언어이지만 힐은 자신이 이룩한 합의에 대하여 큰 자부심이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북핵합의에서 미국은 전술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큰 판단착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즉 이번 합의는 최선도 차선도 아니며 아마도 미국의 또 하나의 실패담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그 이유는 무엇인가?

크리스토퍼 힐에 의하면, 첫째 북한이 이번 합의에 응한 주된 이유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였으나 핵보유국의 지위는커녕,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대상국 클럽에만 들어가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중국이 북한 핵실험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북한이 초기이행조치로서 60일 이내에 영변 핵시설을 봉쇄하면 5만톤의 중유를 제공받지만, 그 다음 이행단계에는 구체적 시간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원들의 지적에 대하여, 힐은 북한이 ‘모든 핵시설과 모든 핵프로그램’의 명단을 제시하고 그 불능화 조치를 취해야만 그 실행에 부응하여 95만톤의 중유를 단계적으로 제공받게 되기 때문에, 북한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빠른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번 북핵합의는 미북간의 양자합의가 아니라 6개국의 다자간의 합의이기 때문에, 특히 중국이 주요 역할을 하였으므로 북한이 합의를 깨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북한이 합의에 응한 동기와 핵불능 내지는 핵폐기에 대한 대가로 기대하는 것, 그리고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의 받을 불이익에 대한 미 정부의 판단에 대하여 필자는 어느 하나도 동의할 수 없다.

첫째, 잘 알려져 있지만,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유엔의 북한제재에 동참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취한 조치는 초기의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나아가 북한은 핵실험시 유엔제재가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였고, 이 점은 미사일 발사의 경우에 비추어 보아서도 너무나 명백했다. 차라리 북한은 핵실험을 해도 중국이 식량과 석유제공을 중단하지는 못하리라는 점, 즉 북한의 핵보유보다 북한의 붕괴를 더 우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유엔의 대북제재에서 ‘말의 성찬’을 빼고 북한을 실제적으로 압박한 무엇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엔회원국 모두가 북한의 제재에 대한 이행사항을 보고하게 되어 있으나 몇 개국이나 이 의무사항을 실행에 옮겼는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이란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미국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자국의 이해문제로 사실상 무관심하다. 또 부끄럽고 유감스럽지만, 한국정부는 핵실험 이후 어떤 반응을 하였고 어떤 조치를 취하였나? 쌀과 비료 지원을 일시 중단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는 점, 심지어는 북핵해결이 무산되더라도 제공하겠다는 말도 들렸다.

둘째, 북한이 60일 이내에 용도를 다한 영변의 핵시설을 폐쇄하리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지만, 그 다음 조치로 95만 톤의 중유지원을 빨리 받기 위해 모든 핵시설, 모든 핵프로그램을 빨리 신고하고 불능화하리라는 힐의 생각은 솔직히 ‘개그’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힐 스스로 계산하여 제시하였듯이 중유 100만톤은 약 2억5천만불 정도로서 한화로 2500억원 정도다. 북한의 경제 규모에 비추어 큰 액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핵개발과 핵실험에 쏟아 부은 돈은 아마도 이것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심지어 90년대에도 김일성의 궁전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8억불을 썼다는 나라가 북한이다. 힐은 함잡이 앞에 돈봉투를 하나씩 깔아서 집안으로 끌어들이듯이 중유를 북핵의 불능화 조치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주면 사탕 줍듯이 북한이 집안으로 들어올 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합의에 동의한 이유와,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 조치이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리라는 이유는 클린턴의 유명한 선거구호를 빗댄다면 “문제는 한국이야, 이 바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김정일의 북핵은 ‘내구성 상품’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북한은 봄철 파종기, 춘궁기를 전후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비료와 쌀을 받아가고, 그 이후에는 서해교전을 일으킨다거나 각종 남북회담을 무산시킴으로써 긁힌 자존심과 몸값을 보수하고 한껏 올려서, 가을철에 다시 비료와 쌀을 걷어간 후에는 뱃장을 튕기다가 봄철이면 몇몇 남북회담에 응해주면서 비료와 쌀을 요구하여 걷어가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물론 김대중 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정부도 비료와 쌀이 이런 용도로 사용되고 또 요구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참으로 뻔뻔하고, 참으로 이해심 많은 한 쌍이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북한의 행태는 이벤트를 약속하여 쌀과 비료를 걷어가고, 약속한 이벤트를 맛만 보여주거나 무산시켜 몸값을 올리는 것이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물론 한국사회의 기억력이 치매 수준인 것도 그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앞으로 논의하기로 약속받은 국군포로와 납북자문제는 2006년 4월 11일 남북장관회담에서 봄철 비료 15만 톤을 받아간 후 다시 30만 톤을 요구하면서 논의하기로 했던 아이템이다. 당시에는 DJ의 방북도 돼지 구울 때 닭도 곁다리로 굽듯이 약속하고, 이후에 경의선 시험운행 무산과 함께 날려 보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일이 현대판 봉이 김선달인 것은, 비록 남한정권의 짝짝궁도 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한국이 2007년에 북한에 (퍼)주기로 장만한 돈만 중유 100만 톤의 4배에 해당하는 거금 1조원이다. 또 “북한에는 아무리 주어도 남는 장사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남한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대선주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북핵합의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 북핵합의는 핵공갈에 의한 김정일의 첫 번째 추수라고 보면 된다.

중요한 점은 한국으로부터 받아갈 수 있는 공개적, 비공개적 지원이 이제는 북핵합의가 지연·무산되든 말든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만일, 초기이행조치 이후 미국과 북한이 “모든 핵시설과 모든 핵프로그램”의 ‘모든’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즉 고농축우라늄의 존재와 플루토늄의 양과 핵무기의 수 등에서 합의를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힐은 핵시설과 핵프로그램에 고농축우라늄(HEU)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미국과 한국에서조차 이에 대한 의구심이 노골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북한이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힐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핵불능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른바 의미론적 문제가 제기되리라는 점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시간표도 없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계속 흐를 경우 미국은 어떤 대안이 있는가?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아무 것도 없다.

중유 95만톤? 힐 스스로 인정하지만 북한 에너지의 10%도 안 되는 양이며 액수로도 한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아가 북핵합의 이행이 지연될 경우, 중국이 북한을 제재할 방법도, 근거도 찾기 힘들다. 왜? 북한은 이행지연이 미국의 일방적 고집, 확실하지 않은 정보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직도 북한정권의 본질을 충분히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핵을 포기하고 북한이 먹고 사는 방법은 계속 구걸에 의존하든지, 아니면 개방하는 것이다.

첫번째 경우, 남한의 정권이 바뀌면 핵 없이는 구걸이나 공갈이 힘들 것이다. 두 번째 경우, 수령독재와 개방은 물과 기름의 관계에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김정일 정권은 한번도 장기적 경제회복을 구상한 적이 없다. 차라리 수령이 경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경원시 해왔다.

전통일부 장관 이종석이 말하듯, 앞으로 몇 개월 내에 북한의 핵포기 진정성에 대한 “진실의 순간”이 올 것이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납북자와 국군포로, 경의선·동해선, 그리고 각종 회담과 같은 이벤트들처럼 ‘북핵폐기’라는 아이템 역시 김정일에게는 일회용이 아니라 다회용 내지 내구성 상품, 혹은 ‘장군님 기획사’의 장기공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오래된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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