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싱’을 보며…준이, 철민이, 우리 아들들

아들아. 너는 나의 스승이다. 너는 나에게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를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너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 행복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걸어온다. 네 노래 소리는 행복의 울림이고, 너의 달음박질은 행복의 몸짓 그대로이다. 행복이라는 녀석의 무게는 25Kg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네가 달음질쳐 나에게 안겨올 때의 그 낭창함, 네가 무거워짐에 따라 나의 행복도 자라난다. 어느 날 그 낭창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되면 잠깐 슬퍼질 수도 있겠다.

아들아. 너는 나의 스승이다. 너는 나에게 불행이라는 추상명사를 또렷하게 각인한다. 넉 달 전이구나… 나는 너로 하여금 지옥의 실체를 보았다. 네가 승용차 바퀴 속으로 딸려 들어간 것을 보았을 때 난 한 마리의 짐승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아귀, 축생, 수라계의 불행에 놓이게 된다.

아들아. 그리하여 너는 나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가끔 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영화 ‘크로싱’을 보고 그저 하염없이 생각한다. 아니지,, 생각이 찾아든다. 아니구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들아. 우리 준이 불쌍해서 어떡하니? 그 어린 것이 사막에서 잠들 때 얼마나 그리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너 만한 나이에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 네 누나만한 나이에 몽골사막에서 죽었지. 철민이… 철민이었지. 아비를 찾아 중국 동북을 떠돌다가 몽골사막, 아비를 만날 수 있는 지척에서 죽어가야 했던 북녘의 아이.. 철민이… 준이는 많은 철민이의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철민이의 친구이고, 우리의 아들이지..

내 어릴 때는 어떠했던가? 멀어 그런지, 현재 아비라는 존재감 때문인지 준이와 철민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발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비를 언제 즈음이 되어야 슬픔없이 떠 올릴 수 있을까? 이제 그 아비는 어찌 살아가나. 아들을 가슴에 묻고 어떤 까닭으로 살아내나.

수 만 명의 꽃제비들, 그 아이들의 아비, 어미들, 그 이웃들, 절대 다수 북한의 인민들. 부모를 잃고, 아이를 잃고,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그 견딜 수 없는 불행 속을 어찌 살아가나 어찌 살아내나.

나의 슬픔에 비하면 영화는 너무 밋밋하더구나. 감독이 애써 그리한 것 같다. 하기야 너무 슬퍼서 영화에 다 담기도 어려웠으리라. 아무튼 아들아. 난 그 감독과 배우들에게 다함없는 존경을 드리고 있다. 돈 내고 시간 내서 갔는데 나를 슬프게 한 사람들에게 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광주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들을 아파하는 시인, 가인이, 소설가가, 그리고 영화인이 한 명도 없다면 그런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 광주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시-공간에서 비참한 고통의 향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아파하는 예술인이 단 한명도 없는 사회에 그런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

몽골사막에서 너무 억울하고 허망하게 죽어간 철민이를 준이로 불러내어 우리에게 보여준 영화인들에게 아비가 감사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그 중에 하나가 희망의 근거이다. 아비가 사랑하는 – 왜냐하면 네가 살아갈 나라이니까 – 나라에도 사람을 사랑하는 영화예술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그렇다.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의 아픔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예술인을 보았기에 그렇다.

스승인 아들아. 이해해 다오. 너에게만 전념하지 못하고 철민이와 준이들 그리고 그 아비들을 도무지 잊지 못하는 너의 아비를…. 언젠가 네가 물었지. “아빠~ 왜 우리는 차가 없어요? 차 사요~” 그때 너를 목에 태우며 짓던 아빠의 어색한 웃음을 기억하니? 아빠도 또 다른 희망의 근거가 되고 싶었기 때문인데 너무 과분한가 싶다.

너를 사랑한다. 내 모든 영혼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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