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본 최성룡 켈로부대 전우회장의 소회는 이같이 남달랐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최 회장의 아버지 고(故) 최원모 씨는 한국전쟁 당시 켈로부대 소속 ‘북진호’의 함장으로 해상에서 적(敵)선을 섬멸하고 중공군 포로와 식량 등 물자를 노획하는 등 전공(戰功)을 세웠다. 인천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최 씨는 정전협정 이후로도 해군 첩보부대 등과 함께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한에 침투하기도 했다.
이후 최 씨는 지난 1967년 6월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 중 북한 무장선에 의해 납북됐다. 당시 북한은 최 씨가 조업하던 ‘풍북호’를 강제로 납치한 뒤 선원들을 모두 돌려보냈지만 켈로부대 출신인 최 씨만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는 1970년 북한에서 인민재판에 회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최 회장은 최근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켈로부대를 철전지 원수로 생각했다고 한다. 38선 이북 사람들로 구성된 켈로부대원들이 북한 지역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 미군과 국군에 전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전황이 불리해졌다고 생각한 것”이라면서 “김일성은 켈로부대원들을 최고의 반역자로 간주했고, 전쟁 후에는 이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모두 죽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 아버지도 희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KLO(켈로)부대…美 극동사령부가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
그렇다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등장하는 켈로부대는 어떤 부대일까. KLO(Korea Liaison Office)는 ‘주한 첩보연락처’ 혹은 ‘주한국연락반’으로 알려진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6월 1일 북한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다.
켈로부대는 특정한 부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주한 첩보연락처/주한국연락반’ 산하에 있던 10여 개의 부대(동키, 레오파드, Y 부대, 유격백마부대 등 별칭이 다양했다) 등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한국전쟁 동안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부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공개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켈로부대는 1951년 9월 제8240부대 주한 국제 연합 유격군(UNPIK)의 첩보부대로 편입됐고, 1952년 6월에 제8250부대로 확대 개편됐다.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자 육군 직할대로 예속되었다가 이후 해체됐다. 이때까지 제8250부대에 남아 있던 소속 부대원들은 정식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고 육군의 여러 부대들로 분산 배치되기도 했다. 이후, 국군에 계속 남은 켈로부대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1958년에 제1공수특전단이 창설됐고, 이들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 편입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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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은 “우리 아버지는 평안북도 정주군의 청년과 학생들로 구성된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 소속이었다”면서 “이분들은 북한 지역에 파견되는 유격작전부대와 첩보부대 등으로 나눠 활동했다. 이들은 서해안에 있는 대화도를 비롯해 그 인근에 있는 소화도, 탄도, 가도, 가차도 등을 차례로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552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전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 회장은 “이 분들께선 정전협정 체결이 임박할 무렵인 1953년 7월 서해안 인근의 섬들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전협정 체결 전후로 섬들을 포기하고 남하하라는 지시를 받고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들 모두가 38선 이북에 가족을 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 이분들에게 누군가가 정전협정 때문에 다시는 38선 이북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면서 “가족을 잃은 이 분들의 슬픔·상실감에 대해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조국을 위해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이런 처사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이런 문제는 지금에 와서라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켈로부대원들에 대한 보상…19대 국회서 논의됐지만 무산, 20대 국회서 재차 발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켈로부대원들에 대한 정부의 보상은 어떠할까. 최 회장에 따르면 현재 공식적으로 켈로부대 출신 중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32명(정부는 故 최원모 씨에게도 전공(戰功)을 인정해 켈로부대 출신 납북자 중 처음으로 2013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에 불과하다.
전시에 가장 위험하고 힘든 임무를 수행했지만 켈로부대원들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켈로부대원들의 공적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켈로부대원들이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했던 비정규군이자 무명용사라는 점도 공적 증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최 회장은 “아버지(故 최원모)의 경우 기록이 남아 있어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훈장에 선박대장이라는 계급이 명기된 것도 같은 이유”라면서 “정부에서 훈장을 주는 규정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켈로부대원들의 공적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하고 공이 있는 분들을 선발, 그 분들에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면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최 회장은 지난 19대 국회서 켈로부대 등을 보상하는 법안(6·25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는 한편, 20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이 법안(6·25전쟁 전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김종태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통과돼 켈로부대원들의 명예가 회복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는 “가족을 등 뒤로 하고 6.25전쟁 때 임무를 수행한 켈로부대원들이 전쟁 후에 느꼈을 상실감과 고통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반문해 보고 싶다”면서 “켈로부대원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이번 20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이 법률안이 통과돼서 켈로부대원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최 대표는 “켈로부대 전우회장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어느 국가와 민족이든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면서 “북한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사회에선 너무나도 쉽게 잊혀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게 계속 (이들을)기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영화처럼 켈로부대를 조망한 영화가 나왔으면 살아있는 켈로부대원을 초청해서 같이 영화를 보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이 될 것인가. 국가가 켈로부대원들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줄 수 있는 것”이라면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부대원들을 초청해서 인천상륙작전 영화를 함께 관람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최성룡 켈로부대 전우회장과의 인터뷰 전문]
-현재 켈로부대 전우회장을 맡고 있다. 켈로부대의 활약상이 담긴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서 남다른 소회를 느끼셨을 것 같다.
우선 지금이라도 켈로부대를 조망한 영화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 장군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아버지도 소속돼 있던 켈로부대를 포함한 많은 이름 없는 용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인천상륙작전 뿐 아니라 한국전쟁 전반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희생했던 분들을 기린 영화가 나온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 중에는 영화를 통해서 켈로부대를 처음 접한 분이 많이 계실 것 같다. 켈로 부대는 정확히 어떤 부대인가?
KLO(Korea Liaison Office)는 ‘주한 첩보연락처’ 혹은 ‘주한국연락반’으로 알려진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6월 1일 북한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다. 부대 별칭인 ‘켈로’는 ‘KLO’의 한국어 발음에서 따왔다.
켈로부대는 특정한 부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주한 첩보연락처/주한국연락반’ 산하에 있던 10여개의 부대(동키,레오파드,Y 부대, 유격백마부대 등 별칭이 다양했다) 등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한국전쟁 동안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부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공개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켈로부대는 1951년 9월 제8240부대 주한 국제 연합 유격군(UNPIK)의 첩보부대로 편입됐고, 1952년 6월에 제8250부대로 확대 개편됐다.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자 육군 직할대로 예속되었다가 이후 해체됐다. 이때까지 제8250부대에 남아 있던 소속 부대원들은 정식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고 육군의 여러 부대들로 분산 배치되기도 했다. 이후, 국군에 계속 남은 켈로부대 출신자들을 창설요원으로 해서 1958년에 제1공수특전단이 창설됐고, 이들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 편입되게 된다.
-켈로부대는 주로 어떤 임무를 수행했나?
켈로부대의 훈련은 미군이 담당했고 조직이나 군수지원 등에서도 미군이 개입했다. 창설된 초기에는 유격을 위주로 담당했는데, 이들 부대원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미군이 미국 통제하여 미군 부대 산하로 편입시키고 미 특수부대 등을 통해 운용했다. 켈로부대원들 대부분이 38선 이북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특별히 중용됐다고 한다.
또한 첩보임무 이외에 이분들은 고성 앞 알섬, 원산 앞 여도, 함경북도 성진 앞 양도 등에 주둔하며 보트를 이용한 작전을 펼치거나 포로탈출, 교량폭파, 정보수집 등 게릴라전을 벌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최 대표님의 아버지께선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의 일원인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우리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던 ‘8240유격백마부대’는 평안북도 정주군의 청년과 학생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분들은 북한 지역에 파견되는 유격작전부대와 첩보부대 등으로 나눠 활동했다. 이들은 서해안에 있는 대화도를 비롯해 그 인근에 있는 소화도, 탄도, 가도, 가차도 등을 차례로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552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 분들께선 정전협정 체결이 임박할 무렵인 1953년 7월 서해안 인근의 섬들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전협정이 체결 전후로 섬들을 포기하고 남하하라는 지시를 받고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38선 이북에 가족을 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분들에게 누군가가 정전협정 때문에 다시는 38선 이북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38선을 그어놓고 무조건 다시는 못 올라간다고 선언한 상황해서, 가족을 잃은 이 분들의 슬픔·상실감에 대해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조국을 위해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이런 처사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이런 문제는 지금에 와서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버님께선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에 침투하신 걸로 아는데?
그렇다. 아버지는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의 선박대장이었고, 정전 협정 이후로도 해군 첩보부대 등과 함께 북한에 침투했다. 그때 아버지는 인천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었는데, 아버지를 포함한 일부 대원들이 미처 탈출하지 못했던 가족들을 탈출시키거나 다른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북한에 침투한 것이 사실이다.
6.25 전쟁 때 네코부대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북한 전력의 핵심이던 옛 소련제 T-34 전차와 미그(MIG)-15 전투기의 정보를 파악한 것이다. 당시 두 무기 때문에 한국군 및 연합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네코부대는 북한 적진에 침투해 T-34 전차 장갑판 해치와 기밀문서, 미그-15의 엔진과 통신 관련 핵심 부품을 빼앗아 왔다 .
-영화를 보면서 아버님 생각에 참담하셨을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납북되신 건가?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1967년 6월 연평도 인근에서 ‘풍북호’를 타고 조업 중에 동료 선원 7명과 함께 북한에 납치됐다. 북한은 다른 선원들은 돌려보냈지만 우리 아버지의 경우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사실이 밝혀져 1970년 인민재판에 회부돼 처형됐다.
-영화 속 이발사(켈로부대 대원, 극중 인물 최석중)의 죽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발사(극중 인물 최석중)역할을 하던 사람이 죽을 때 목에 걸고 있던 팻말 내용이 기억나는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다’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 속에 처형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원통했다. 아버지도 납북된 후 켈로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북한에서 처형당하지 않았나. 죄목 역시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켈로부대원이었던 이발사 역할을 하던 분의 죽음을 보니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김일성은 켈로부대를 철전지 원수로 생각했다고 한다. 38선 이북 사람들로 구성된 켈로부대원들이 북한 지역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 미군과 국군에 전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전황이 불리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일성은 켈로부대원들을 최고의 반역자로 간주했고, 전후 남아있는 가족들을 모두 죽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 아버지도 희생된 것이다.
-대표님의 아버지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많은데, 적절한 보상이 이뤄졌나?
안타깝게도 전시에 가장 위험하고 힘든 임무를 수행했지만 이분들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이분들은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비정규군이자 무명용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 일각에선 이 분들에 대한 공적을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켈로부대 출신 중 32분이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도 2013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켈로부대 출신 납북자 중 유일하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켈로 부대원들은 계급이 없는 분들인데, 아버지가 받은 훈장에는 선박대장이란 계급이 명기되기도 했다.
-19대 국회에서 켈로부대원들에 대한 보상 관련법이 발의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대 국회서 6·25 참전 비정규군인, 켈로부대를 보상하는 법안(6·25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과하기도 했었다. 이 제정안은 6·25 전쟁 중 적 지역에서 국군이 아닌 신분으로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미 8240부대 등 비정규군에 소속돼 유격 또는 첩보수집 임무를 수행한 이들과 그 유족에 대해 공로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끝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대상자 범위가 정확치 않고 다른 참전자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예산소요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여당 일부 의원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소관 상임위인 국방위원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했지만 법사위에서는 정작 여당 의원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한 것이다.
켈로부대원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가족을 등 뒤로 하고 6.25전쟁 때 임무를 수행한 켈로부대원들이다. 이들이 전쟁 후에 느꼈을 상실감과 고통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반문해 보고 싶다. 현재 20대 국회에서도 ‘6·25전쟁 전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김종태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된 상황이다. 이번 20대 국회 때는 반드시 이 법률안이 통과돼서 켈로부대원들이 명예가 회복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켈로부대 전우회장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어느 국가와 민족이든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사회에서 천안함과 연평도 피해자 분들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북한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 사회에선 너무나도 쉽게 잊혀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게 계속 기억하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이번 영화 상영 부분에서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 국방부에서 현역 군인들을 대상으로만 시사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 볼 돈이 없어서 시사회 초대를 바라겠는가. 켈로부대를 조망한 영화가 나왔으면 살아있는 켈로부대원을 초청해서 같이 영화를 보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이 될 것인가. 국가가 켈로부대원들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참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부대원들을 초청해서 인천상륙작전 영화를 함께 관람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는 우리대로 명예롭고, 정부는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