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도 피해가지 못한 ‘종북주의 함정’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여론 비판이 의외로 장기화 되고 있다.


퇴임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안밖에서 공통적인 비판에 시달린 적은 일찌기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카터와 함께 방북했던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부룬드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등의 서울 기자회견 발언 때문에 전직 국가수반 모임인 ‘더 엘더즈’까지 도매급으로 전락할 지경이다. 국제사회에서 나름 전문가로 통하는 이들이 북한 고위관리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북한인권문제, 유엔결의안 위반 문제 등에는 철저히 함구했던 탓이다.


카터에게는 1994년 북한의 1차 핵위기 당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단독 회동을 가졌던 기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카터는 지난해 8월, 북한에 억류중이던 아이잘론 말리 곰즈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때에도 김정일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보란듯이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카터는 이번에도 “김정일을 만나고 싶다. 김정은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었다. 아버지 김일성이 ‘친구’라고 치켜세워 줬으니, 아들 김정일이 직접 환대에 나서거나 최소한 손자 김정은이라도 내세워 줄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카터의 바램은 3일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김영남 등 북한 고위 당국자들로부터 그들의 변명만 듣고 왔다. 결국 카터가 서울 기자회견에서 꺼내놓은 방북 결과 설명은 “미국이 북한의 안전보장을 해줘야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는 북한의 케케묵은 ‘프로파간다’가 전부였다. 카터는 북한주민들의 식량문제라는 ‘인도적 문제’에 대해서도 부연했다. 한국정부가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하지 않아서 북한 주민들이 굶고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한미 당국과 전문가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국내 여론이다.


제이컵 설리번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29일 “누가 북한 주민들의 곤경에 책임이 있는지를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면서 “그것은 북한 정권 자체”라며 카터의 주장에 반박했다. 그는 한미 양국의 대북식량 지원 중단을 비판했던 카터에 대해 “그런 전제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지난 2009년 3월 인도주의 요원들에게 북한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대북 식량지원 프로그램을 돌연 중단시킨 것은 북한”이라고 상기했다.


수전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28일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김정일 정권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에 대해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카터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나 “카터 전 대통령이 소련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냉전을 연장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이번 방북은 수백만 명을 죽인 독재자에 대한 유화책”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역시 “김정일은 카터를 단지 메신저로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카터가 서울로 가던 중 연락을 받고 차를 돌려 김정일의 메시지를 받은 것은 “모욕적이고 무례한 짓”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북한은 28일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순안공항으로 향하던 카터 일행을 다시 불러,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김정일의 친서를 낭독케 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중국의 반응 역시 냉랭하긴 마찬가지다. 우다웨이 한반도사무 특별 대표는 29일 “카터 생각은 카터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공식적인 평가 자체를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될 것을 카터는 먼저 나선 탓에 더 크게 욕을 먹고 있다. 지난해 방북처럼 억류중인 미국시민에 대한 석방문제는 입도 떼지 못했기에 그의 ‘방북보따리’는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번 카터 방북 건은 ‘국제 분쟁 중재자, 남북평화의 메신저라는 명예에 눈이 어두운 퇴임 대통령의 노욕(老慾)’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터식의 ‘무지(無知)’가 우리 정치권과 시민사회영역에도 폭넓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에피소드 쯤으로 넘어가 주기도 어러워 보인다. 


‘미국이 김정일의 체제 안정을 보장하면 김정일의 도발이 줄어 들 것’이라는 착각은 우리 사회에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햇볕정책 10년 동안에도 우리사회는 김정일의 핵개발, 서해도발에 시달려 왔다. 


김정일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지난 60년간 수령독재가 낳은 굶주림과 빈곤, 인권유린이 낳은 주민들의 불만이다. 여기에 ‘미제의 식민지 억압 정책 아래서 자본주의를 강제로 이식 받았던’ 한국이 보여준 놀라운 정치·경제 발전 결과는 김정일 체제의 당위성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결국 미국이 김정일의 체제 안전을 보장해주기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가지 뿐이다. CIA와 미군을 투입해서 북한내 반체제 요소를 직접 제거해 주던가, 아니면 평양의 노동당 청사와 김정일의 집무실에 대한 경비를 서주는 일 정도다. 이 역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김정일조차 받아 들일 수 없는 허망한 예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한때 전세계를 호령하던 카터의 명예가 이렇게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적지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리의 야권 인사들과 시민단체 리더들도 카터가 보여준 기행(奇行)의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음미해 봐야 할 것이다. 종북(從北)주의가 빚어내는 오판의 함정은 전직 미국 대통령조차 피해가기 어렵다는 교훈을 똑똑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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