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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제2조는 “정화(停火, cease fire)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를 다루었다.(전편기사 바로가기)
여기 13조 (ㄴ)항과 15조에 서해상의 섬들의 군사적 관할권과 해면(海面)에 대한 규정이 등장한다. 조금 길지만 이 두 조항을 잘 이해하는 것이 NLL과 관련된 논의에 필수적이므로 전문을 인용한다(북한측 문서 인용):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십(10)일 이내에 상대방의 한국에 있어서의 후방과 연해섬들 및 해면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군사력량, 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 만일 철거를 연기할 쌍방이 동의한 리유없이 또 철거를 연기할 유효한 리유없이 기한이 넘어도 이러한 군사력량을 철거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방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어떠한 행동이라도 취할 권리를 가진다. 상기한 “연해섬”이라는 용어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하는 것이다. 단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북위 37도58분, 동경 124도40분), 대청도(북위 37도50분, 동경124도42분), 소청도(북위37도46분,동경124도46분), 연평도(북위 37도38분, 동경125도40분) 및 우도(북위37도36분, 동경125도58분)의 도서군들을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 두는 것을 제외한 기타 모든 섬들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의 군사통제하에 둔다. 한국서 해안에 있어서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섬들은 국제 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 둔다(정전협정 제2조 13항 ㄴ).
본 정전협정은 적대 중의 일체 해상 군사력량에 적용되며 이러한 해상 군사력량은 비무장지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한국 륙지에 린접한 해면을 존중하며 항구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정전협정 제2조 1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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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 NLL 주장의 근거
위 정전협정 제2조 13항(ㄴ)을 보면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남겨 두는 것’으로 명기돼 있다. 따라서 서해 5도 군사관할권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논란의 단초는 해상분계선이 분명하게 명기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의 첫 번째 규정을 잘 살펴보면 서해상에서는 동해와는 달리 섬들의 군사관할권만을 규정하고 있고 두 번째 규정에서는 “인접해면을 존중”이라는 애매한 표현-유엔군은 해면의 폭을 3해리로 간주하였다-과 항구의 봉쇄에 대한 금지 조항만이 있을 뿐, 쌍방의 군사력이 철수하여 전후방이 분명히 갈라지는 해상 군사분계선은 -비록 후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지만-실제로 규정되지 않고 있다. 즉 정전협정에 의하자면 서해상에서는 동해와는 달리 인접해면을 제외한 모든 해면에서 쌍방의 배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리영희교수가 1999년에 쓴 『반세기의 신화』라는 책에 수록된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라는 논문에서 서해상에는 “섬들을 연결하는 어떠한 군사분계선”도 존재하지 않으며 서해상의 섬들은 마치 “기하학의 점처럼 위치만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 이유도 바로 위의 정전협정의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또 리교수가 1999년에 일어난 연평해전 당시에 “무지한 신문인들과 소위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교수들이 오히려 ‘한국의 영해 침공’이라고 대서특필하고 방송 텔레비젼에서 국민감정을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정전협정에 따르면 서해상에는 군사분계선이 없기에 북한 해군이나 민간선박이 마음대로 남쪽으로 항해할-다만 인접해면만을 존중한다면- 권리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해 침공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 국무성 부대변인은 1999년 6월 16일 연평해전이 일어나자 “NLL은 40여년간 남과 북이 현실적으로 존중한 한계선”이라는 발언에 이어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질문: 그곳은 사실 공해이지요. 그렇지요?
폴리: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질문: 그러면 북한은 공해상에서 조업할 권리가 없습니까? 북방한계선이라는 조약이 아닌 조약을 제외한다면.
폴리: 나는 이 질문이 북한과 남한 모두의 국가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대결을 피하는 것- 그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긴장이 줄어들고 모든 분야에서 앞으로 좀 더 나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명백한 점은 군사력이 인접하여 서로 간에 충돌한다면 이런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현실적인 문제이고 그것이 양쪽의 이해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당신은 북한사람들이 이 해역에서 조업할 수 있는 협약이 체결되기를 원하십니까?
폴리: 나는 이 특수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
미국의 입장은 정전협정에 의거하면 서해상에서 섬들과 섬들을 둘러싼 인접해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해이지만, 남북한의 군사력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NLL은 현실적으로 기능하여 왔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아마도 이재정 통일부장관의 “반성 운운” 발언의 취지도- 바로 NLL이 군사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으로 미국의 애매한 입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에서 근무하였던 전직 미 해군 고위 정보분석관 마크 스테판(Mark Stephens)은 연평해전 당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북한 해군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을 때마다 이 월선이 남한과 미국의 보도채널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위반’이라고 지칭되었다. 유일하게 진정한 위반이란 실은 남한의 배가 북방한계선 북쪽으로 넘어갔을 때뿐이다.”
심지어 한국의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은 1996년 7월 국회에서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도 정전협정과는 상관없다”는 발언을 하여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천용택 전의원의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위의 모든 주장은 정전협정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서 정전협정의 서명자가 아닌 한국의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다.
정전협정과 NLL 설정의 배경을 이해해야
그렇다면 NLL을 사실상의 군사분계선으로 간주하여, 이를 말 그대로 사수하고자 지난 2002년 서해교전 당시 산화한 장병들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무의미하게 생을 마쳤다는 것인가? 예를 들어 이재정 통일부장관의 “반성 운운”하는 표현은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NLL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NLL은 한국전쟁 시 북한에 일체의 군수물자가 해상으로 지원되는 것을 봉쇄한 클라크 라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이해이다.
정전협정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인 1953년 6월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를 유엔군과 상의하지 않고 석방하여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포로교환 문제로 정전협상이 2년을 끌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북한의 반응이 어떠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다.
1953년 6월 19일 판문점에서 공산군측 연락장교는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유엔군 사령부는 이승만 일당을 통제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한국에서의 정전이 이승만 일당을 포함하는가? 만일 포함하지 않는다면 남한 측에도 정전협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어떤 보장이 있는가?
클라크 대장은 6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으나, 클라크는 이대통령에게 현실을 수용하여 정전협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를 갈라놓을 정전협정에 서명할 수는 없지만 정전을 지원할 용의는 있다며 한 발 물러섰다.
이대통령의 이 발언에 고무된 미국 측은 정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하고 클라크 대장은 공산군측이 6월 19일 제기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즉 정전이 이승만정부를 포함한다는 확약을 주라는 것이다.
클라크는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자신의 위치는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군사적 분야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 독립적인 한국의 주권행사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한이 없다는 점을 밝히면서, 2만5천명의 포로 석방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은 한국에서의 정전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포함하는지 질문하였다.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질문에서 남한 측에 정전협상이 실현될 수 있는 어떤 보장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추구하는 정전은 양쪽 사령관 사이의 군사적 정전이며, 양쪽 사령관 휘하의 군사력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정전협정의 어떤 부분들은 대한민국의 협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 정전협정이 준수되도록 군사적 안전장치를 수립할 것이다.
1953년 7월 8일 공산군 측은 바로 이 군사적 안전장치를 수립하겠다는 클라크 대장의 보장으로 인해 “유엔군사령관의 편지에 전적으로 만족하지는 않지만 정전협정을 조인하는 데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사령관들에 의해 조인되고, 그 한 달 후인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이 설치되었다.
그것은 리영희 교수 등 친북좌파 지식인들도 모두 인정하듯이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고, 실은 정전협상 시 클라크가 공산군 측에 보낸 편지에서 이미 밝힌 사실이다. 즉 정전협정에 육지와 동해상에는 분명히 규정된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만 서해상에는 섬들과 이에 인접한 해면의 관할권에 대한 규정만이 있으므로 편지에서 밝힌 “군사적 안전장치”란 논리적으로 서해상에서 한국군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제한하는 조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한국 국방부가 NLL이 북한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아마 이 점일 것이다).
이제 NLL이 정전협정에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을 합의하지 못하여 도입됐다는 점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즉 NLL이 정전협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이해일 뿐이며 NLL에 대한 논란의 근본 원인은 미국, 북한, 중공이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을 -그 어떤 이유에서이든- 합의하지 못했거나 안했기 때문이다. 즉 NLL에 대한 논의에서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NLL을 한국의 북방한계선 뿐 아니라 북한의 남방한계선으로 해석하고 실행하여온 한국의 입장이 과연 합당하느냐는 것이다.
한국의 주권 유린
리영희 교수등은 “북방한계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경계’란 개념 자체는 상식적으로 일방적일 수 없다. 즉 NLL 넘어 북쪽으로 진출하면 북한군과 조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남에 머물러야 하며 그래야 정전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NLL 도입의 취지이자 의미인 것이다.
바꿔 말해 NLL이 북한의 남방한계선이라는 것은 NLL의 취지상 논리적 결론이며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NLL을 설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NLL을 지켜야 할 의무는 한국에만 있고 북한은 마음대로 NLL 남쪽으로 진출해도 정전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북한은 물론 국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NLL이 한국만의 북방한계선이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될지를 생각해 보자.
정전협정의 서명자들인 미국 및 북한(전쟁도발국), 중공은 서해상을 공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은 NLL 이남에서 얌전히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즉 한국의 주권유린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은 절대로 NLL을 한국만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경계선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만일 그런 주장을 하는 자는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리영희교수나 앞의 전직 미 해군 정보분석관이라는 자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