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아, 北붕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자”

▲현재 일본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박충식 씨는 향후 북한에서 경제정책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데일리NK

지난 25일 밤 북한인권콘서트 ‘탈북고아에게 사랑을’ 행사가 열리던 서울광장. 중국에서 버려진 채 혼자 떠돌고 있는 탈북고아들의 모습이 무대 화면에 상영되자 소리 없이 눈가를 훔치는 청년이 있었다.

여동생과 함께 탈북해 중국-한국을 거쳐 지금은 일본에서 어엿한 대학생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박충식 씨. 그 역시 10년 전에는 중국을 떠돌던 탈북고아였다. 박 씨 남매의 수기는 ‘국경의 아리아’라는 책으로 출간돼 2008북한인권국제캠페인에서 배포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중국의 탈북고아 실태에 대해 “내가 여동생과 중국에 있을 때 보다 휠씬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것 같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탈북고아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탈북고아들이 절대로 북송되서는 안된다”며 “한국정부는 이런 일을 선교사들이나 인권단체 관계자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직접 나서서 중국과 협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는 “탈북고아들이 어떤 꿈이든 절대 포기하지 않고 간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며 “북한 체제가 붕괴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박충식 씨와의 인터뷰 전문]

-어릴적 고향에서는 어떻게 살았나?

“내가 태어날 때부터 북한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였다. 1997년도부터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변했다. 1994년, 그러니까 10살 때부터 나는 장사를 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지역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던 어린애들이 많았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함경북도 김책까지 기차로 이동하며 물건을 파는 장사를 했다. 한국말로 하면 ‘보따리 장사’ 쯤 되는 일이었다.

집에서 빈 배낭을 메고 순천에 가서 학습장(노트)을 사고, 김책으로 다시 가서 물건을 팔고, 김책에서는 싼 소금을 사서 다시 순천으로 와 소금을 팔았다. 배낭 한 가득이면 소금을 채우면 15kg 정도였다.

내가 기차를 탈 때마다 같은 칸에 6~7명 정도의 어린애 장사꾼들이 보였다. 운이 나쁠 때는 기차 지붕 위에 까지 매달려 기차를 탔어야 했다. 그러다가 기차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들도 있었고, 전기에 감전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북한에 그런 어린들이 많았나?

“꽃제비도 많았고, 어른들의 도움없이 제 힘으로 살아야 하는 아이들 많았다. 당시 기차가 멈추는 역(驛)다 꽃제비들이 새카맣게 많았다. 당시 교복이 검정색인데다 씻지 못하고 노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새카맣게 보였던 것 같다.

순천역만 해도 얼핏 봐도 항상 100여명이 넘는 수준이었다. 꽃제비들은 2~3명씩 조을 짜서 역에서 손님들이 먹는 물건을 훔쳐 먹는 애들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은 굶어 죽거나 누가 먹을 것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에서 어릴 적 추억이 있다면?

“우리 동네에는 아버지와 같이 일하던 군인사택이 6~8가구정도 있었고, 일반 농민도 15가구 정도 있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동네에서 놀 때 탄피를 가지고 놀았던 추억도 있다. 한국에 ‘못치기 놀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탄피 안에 못을 6~7개를 넣고 상대편 것을 쳐내 따먹는 놀이를 많이 했다. 방사포 탄피를 가지고 놀다 화약이 터져 손가락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군인사택에 살고 있던 나는 9살까지 부유하게 살았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은 엄청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농민의 아이들 같은 경우는 먹지도 못하고 잘 씻지도 못해 그들을 ‘농포’(농민 거지)라 부르기도 했다.

최근에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우리 집을 본 적이 있는데, 지형 변화가 거의 없어 놀랐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개조를 해서인지 집 문의 방향이 바뀐 것 빼고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일본 생활은 어떤가?

“일본에 건너 간 것은 2005년 3월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회사를 다녔는데, 사장과의 잦은 마찰로 일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갔다.

처음에는 언어소통이 안돼서 힘들었다. 지금은 오사카에서 생활하고 있고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2시30분 정도 통학해 교토에 있는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学)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고, 동생 선희는 오사카에 있는 관서(關西)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편의점, 찻집, 요리사보조 일 등의 아르바이트 일과 약간의 번역일을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 있다”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나는 북한사회, 중국사회, 한국사회, 일본사회를 경험했다. 일본은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라여서 향후 북한을 둘러싼 국제관계 변화에 대해 공부할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는 세계 각국의 여러 현상을 공부하고 싶어서 국제관계학을 선택했다”

-나중에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나?

“무엇을 할지 요즘도 자주 바뀐다.(웃음) 하지만, 우선 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 북한보다는 중국, 중국보다는 일본이 더 발전된 사회라고 보는데, 일본에서 공부한 이후에는 스웨덴에서 좀 더 공부하고 싶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꼭 돌아와 나의 역할을 하고 싶다. 통일 한반도에서 일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선진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이유도 나중에 북한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북한이 가장 낙후된 분야가 바로 사회정치 분야다. 미래에 북한에서 경제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고, 북한 주민들의 시민의식의 발전을 위해서도 일하고 싶다.

동생 선희는 나와 달리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웃음) 우선 남들만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인 것 같다”

-일본에서 북한을 보는 시각은 어떤가?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 비해 세계화 수준이 발전돼 있다. 일본에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난민, 중국의 자연재해 문제에도 관심이 크다.

또, 일본의 인터넷을 보더라도 세계 각국의 언어 팩을 깔아 모든 언어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가라오케(노래방)에 가더라도 최신 일본 노래 수만큼이나 다른 나라들의 노래가 많다.

북한에 대한 관심도 이런 차원이 관심인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다. 일본의 경우는 납치자 문제가 있기도 하고, 핵문제와 인권문제 등 북한에 대한 분노감이 크다. 이와 함께 같은 인간으로서 북한 주민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이 크다.

일본에서 영화 ‘크로싱’ 시사회가 있었는데, 많은 일본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함께 울었다. 또, ‘크로싱’ 영화의 소재가 되는 몽골에서 숨진 철훈 가족의 이야기가 최근 일본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때도 많은 일본인들이 함께 울어 줬다”

-탈북자에 대한 일본사회의 시각은 어떤가?

“내가 한국에서 생활할 때 가장 힘든 점은 인간관계였다. 한국 사람들과는 같이 있어도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북한에서 세뇌교육을 받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탈북자를 바라본다. 쉽게 사람을 평가해 버리고 만다.

탈북자도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탈북자 전체를 무리 지어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경우가 많다. 혹시나 북한이 붕괴되고 남한 사람들이 2천만 북한 주민들과 교류하게 될 때 그런 식으로 대할까봐 매우 걱정스럽다.

반면 일본은 그렇지 않다. 탈북자 집단 전체에 대한 반감도 없고, 탈북자 개인도 그냥 개인으로 인정해준다. 선입견이나 차별을 느껴보지 못했다”

-중국 등 제 3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고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들은 내가 처했던 조건보다 휠씬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절대 들키지 않고 북송되는 일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떤 꿈이든 절대 포기하지 않고 간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북한이 붕괴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참고 살았으면 좋겠다. 꿈은 실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