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11일과 12일에 걸쳐 제주산 귤 200톤, 2만 상자를 북한에 보냈다. 지난 9월 북한이 남쪽에 송이버섯 2톤을 보낸 것에 대한 답례라고 한다. 우리가 받은 선물에 대한 답례이고 귤 전달과정에서 별다른 메시지가 오간 것도 없다고 하지만, 송이버섯이 온 지 2개월 만에 귤이 올라간 것은 ‘연내’로 예정돼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실현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의 의도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북미 고위급회담이 연기된 이후 북한과 미국은 연일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북한은 내부적으로는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대외적으로 제재 완화를 주장하고 있고, 핵개발을 다시 할 수 있다는 ‘병진’ 노선의 부활 얘기를 조금씩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중간선거라는 큰 불을 끈 트럼프 행정부는 “급할 게 없다”는 입장이고, 펜스 미 부통령은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전례 없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 답방’으로 교착국면 풀겠다는 구상 작용한 듯
비핵화 협상이 정체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을 추진하는 것은 답방이 이미 약속된 사안이기도 하지만 김 위원장 답방을 통해 지금의 교착국면을 풀어보겠다는 구상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북미협상이 교착된 상태에서 ‘9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대화의 동력을 살려냈던 상황을 재현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9월 남북정상회담’도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북미 비핵화협상에서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북미 간 대화가 재개되는 계기는 마련했지만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한 번 더 갔다온 것 이외의 진전은 별로 없는 상황이다. 핵신고나 영변 핵시설 폐기, 종전선언, 제재완화 등 비핵화협상의 구체적인 현안들을 놓고는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미 간 불신, 협상 진전 가로막아
우리 정부는 비핵화 협상의 구체적인 현안들에 대해서는 북미가 협상을 통해 이견을 좁히기를 바라는 상황이다. 문 대통령이 제재완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미국이 좀 더 통 크게 접근해 협상의 돌파구를 열어줬으면 하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 내의 북한에 대한 회의론은 만만치 않다. 북한이 찔끔찔끔 카드를 던지면서 전체 핵무기와 핵시설을 언제 어떻게 폐기할 것인지 설계도를 제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북한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미국에 대한 불신이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핵신고를 미루는 이유는 ‘북미 간 불신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핵리스트를 제공하면 미국에 공격목표를 알려주는 것 아니냐’는 이유라고 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미국 쪽에서 보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여전히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행동이다. 결국 북미 간 불신이 지금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우리 정부, 비핵화 협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야
그렇다면,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 온 우리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대화의 모멘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9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바 있다. 지금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비핵화 협상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북한이 지금까지처럼 풍계리나 동창리, 영변이라는 특정 시설에 대한 폐기 카드를 살라미식으로 제시하며 비핵화의 종착점까지 갈 전체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는 한 ‘북한 비핵화 의지’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어찌해서 협상의 한 단계를 넘어선다고 해도 그 다음 단계가 어떻게 될지 계속 의구심이 남기 때문이다. 협상은 뒤로 갈수록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앞 단계의 조치만 보고 후속단계까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물론, 북한도 미국으로부터 받는 것 없이 계속적으로 비핵화 조치에 나설 수는 없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상황인데, 아무런 담보 없이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도 무엇인가 조치를 하면 단계별로 미국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결국 북한이 A라는 행동을 할 때 미국이 B라는 행동을 하고, 북한이 C를 하면 미국이 D를 하는 식의 상호간의 세밀한 이행계약서가 최종적인 비핵화 목표지점까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이른바 비핵화 로드맵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은 계속해서 외줄타기의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핵화 로드맵이 북미 간 협의로 마련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이 힘들다면, 우리라도 로드맵 초안을 만들고 북미 간의 의견을 반영해가며 완성본을 만드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북한, 미국과의 관계가 다 같이 괜찮다는 우리 정부가 때로는 북미 양측을 설득하고 때로는 압박하면서 비핵화의 기본 얼개를 짜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한을 답방한다면 그 또한 중요한 이벤트가 되겠으나, 비핵화 협상의 진전은 이벤트로 끌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북미의 불신이 심각해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우리가 우리의 ‘안’을 가지고 협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