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8차 당(黨) 대회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당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당 대회나 전원회의나 상당히 비중있는 정치행사인데 당 대회가 끝나고 얼마 안 돼 전원회의를 또 소집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한이 보도한 전원회의 결과를 보면 김정은 총비서가 왜 전원회의를 소집했는지 알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김 총비서는 간부들을 확실히 ‘잡도리’하기 위해 이번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대미, 대남관계 연연하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난관 돌파
올해 초 8차 당 대회에서 제시된 북한의 정책노선은 대체로 이렇다. 핵무기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미 대남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와의 연대 하에 자력갱생으로 난관을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중 대결이 심화되고 있으니 중국과의 관계만 원만하게 유지해도 체제를 유지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다만, 경제발전에서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내부의 역량으로 모든 것을 풀어가야 한다는 자력갱생의 원칙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김 총비서는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나름 혁신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에 경제관리의 권한을 확실히 부여하면서, 이른바 힘 있는 특수기관들의 전횡을 방지하는 것을 중요 목표로 내세웠다. 당과 군, 보위기관 같은 힘 있는 기관들이 ‘알짜배기’ 기업들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이득을 챙기고, 정작 내각은 비중이 떨어지는 경제기관들만 관리하면서 경제발전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북한의 고질적인 행태를 고쳐보겠다는 것이다. 대외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과는 다른 혁신적인 방식의 자력갱생을 추구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목표는 너무 높고 어떤 목표는 너무 낮아
그런데 김 총비서가 이번 전원회의에서 지시한 것을 보면 하부 단위에서는 윗선의 의중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김 총비서는 내각이 작성한 올해 경제계획이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질책하면서 “어떤 부문의 계획은 현실 가능성도 없이 주관적으로 높여놓고, 어떤 부문들에서는 … 능히 할 수 있고 반드시 하여야 할 것도 계획을 낮추 세우는 폐단들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농업부문은 불리한 농사조건과 영농자재를 원만히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알곡생산목표를 높이 세워 “관료주의와 허풍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현실성 없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부문들은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전력, 건설, 경공업 부문들은 “기본지표생산계획을 년말에 가서 비판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낮추어 기안하는 편향을” 범했다면서, “조건과 환경을 걸고 숨고르기나 하면서 흉내나 내려는 보신과 패배주의의 씨앗”이라고 질타했다. 목표달성을 못했다는 비판을 우려해 처음부터 목표를 낮게 잡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태도를 보이지 말고,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고 달성을 위해 매진하라는 요구다.
물론 김 총비서 입장에서 어떤 것은 목표 수치가 너무 부족한 것 같고 어떤 것은 현실성 없이 너무 과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김 총비서가 특히 농업 부문의 허풍을 지적한 것은 북한의 농업생산 수치가 그동안 과도하게 부풀려져 왔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랫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할 것으로 보인다. 목표를 높게 잡은 쪽도 낮게 잡은 쪽도 모두 비판 대상이 됐으니 말이다. 김 총비서의 지적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현실성 있게 하라는 것이겠지만, 비판을 받지 않을만한 ‘현실성 있는 목표’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직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현실성 있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윗선이 생각하는 수준’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는 능력이다.
무조건적인 목표 수행 강조
김정은 총비서는 전원회의에서 간부들에게 무조건적인 목표 수행을 강조했다.
“인민경제계획은 당의 지령이고 국가의 법인 것만큼 일단 세워진 인민경제계획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흥정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무조건 수행할 의무 밖에 없다”고 밝혔다. 자재와 노동력을 이유로 평양시 주택건설 목표를 낮춰잡은 건설부문에 대해서도 “당중앙은 올해 평양시에 1만 세대의 살림집을 무조건 건설”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자재보장 문제와 양보다 질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발생산계획을 낮게 세운 경공업 부문도 심하게 비판받았다.
위에서 시키는 것은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무조건 하라는 것이 김 총비서의 요구다. 김 총비서는 이번 전원회의를 통해 “일군들 속에 내재하고 있던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비롯한 사상적 병집들을 찾아내고 시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평했는데, 이 말이 간부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는 짐작이 간다.
간부 ‘잡도리’는 성공, 효과는 있을까
이번 전원회의에서는 당중앙위 경제부장이 당 대회 한 달 만에 경질됐다. 경제계획의 문제점들이 신랄하게 비판 대상에 오른 만큼 책임추궁성 인사로 보인다. 고위 경제간부의 경질과 간부들에 대한 호된 비판, 무조건성의 강조로 김 총비서가 간부들의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잡도리’를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잡도리’가 실질적인 경제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최고지도자의 질타 속에 일선에서의 합리적인 문제제기는 있을 수 없고, 목표수치가 높아도 낮아도 비판받는 상황에서 ‘윗선 의중 살피기’와 ‘형식적인 수치 달성’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연말에 가면 목표를 초과달성했다는 선전이 북한 전역에서 또다시 펼쳐지겠지만 이런 식으로 북한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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