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고발 北 제22호 교화소…탈북자 리준하 육필수기 연재

어머니는 시금치죽을 먹으면서도 사탕장사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두 달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정말이지 부모 곁을 떠나 보아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뜻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참뜻을 5년간의 감옥살이를 통해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20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나는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면회할 때는 얼굴만 보고 손조차 잡아 볼 수 없었으므로 나는 어머니가 위안 삼을 만한 글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 연필과 종이를 펴놓고 편지 내용에 대해 궁리했다. 좀처럼 어머니에게 힘이 될 만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워서 궁리하던 머릿속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날의 일들이 삼삼히 떠올랐다.

1998년 11월 26일, 친구 광일이의 생일이라 놀다가 오후 1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는 “준하냐?” 하며 반기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누워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머니, 어디 아픕니까?”
“아니……”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러 번을 물어서야 어머니는 겨우 말을 떼었다.

“준하야. 너가 모르게 기철이 삼촌한테 돈 2,000원(당시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은 70~100원)을 꾸어 주었는데, 1년이 다 되도록 갚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그동안 여러 번 받으러 갔는데 매번 꼭 갚겠다고 하기에 양보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면서 엄마를 막 때리려고 하더라. 너무 사정을 하기에 돈을 빌려줬는데, 이제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좋니?”

어머니와 먼 친척뻘 되는 그 사람을 나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생을 술로 살았다. 술에 미쳐서 나중에는 아내와 자식들 몰래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술과 바꿔먹고는 집에 도적이 들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런 삼촌을 나는 평소부터 무시했고, 길에서 만나도 못 본 척했다.

‘자기 집을 망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우리까지 괴롭히려 들다니……’

게다가 어머니를 때리려고 했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나를 말리려다가 “돈을 꼭 받아 오겠다”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당시 조선 돈 2,00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곧 삼촌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촌 아내가 나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준하야,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저 인간이 글쎄, 네 엄마 돈까지 술과 바꿔먹었으니. 나도 이젠 더는 같이 못 살겠다.”
“아줌마가 나에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 다 저 사람이 문제지!”

나는 금방 술이 깬 듯 흰자위가 뻘겋게 충혈된 삼촌을 끌고 대문 밖까지 나왔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내일까지 돈을 갚아달라는 말에 삐딱한 태도로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알다시피 이 삼촌이 돈이 어디 있니?”
“그럼 돈 빌려 갈 때는 갚을 생각도 없이 그냥 가져갔소?”
“임마, 엄마하구 내가 버무린 일인데 왜 네가 끼어들어? 쪼끄만 것이 버릇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담벼락에 머리를 찧고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 일인데 아들인 내가 왜 상관이 없소? 사람 알기를 더럽게 아는구만!”

아줌마가 뛰어와서 더 때리지 말아달라며 말리기에 분을 삭였다.

“무조건 내일까지 갚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소.”
“알았다. 며칠 내로 꼭 갚아주마.”
“언제요?”
“열흘 안에 갚아 줄게. 임마!”

정확히 10일 후에 갚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냥 떼먹자고 드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나 혼자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삼촌이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 갔단다.

보안원(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안원은 나에게 자기와 함께 보안서(경찰서, 한국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기관은 ‘분주소’라 함)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항의도 무시한 채 보안원은 나를 보안서로 데리고 가서는 임시로 대기실이라는 방에 가두어 놓았다.

“삼촌이 살아나면 적당한 처분만 받고, 죽으면 너도 죽어야지 어쩌겠냐?”

대기실 철문을 잠그면서 보안원이 말했다. 나는 삼촌이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에 10일 후에 돈을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던 사람이 무슨 일로 죽는단 말인가? 또 지난번처럼 술을 너무 마셔서 위경련이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갇혀 있노라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문이 열리면서 보안서 부서장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집에 가기 전에 비판서에 손지장만 누르고 가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그렇지. 삼촌이 죽을 일이 있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부서장을 따라 어느 기다란 집에 들어갔다. 보안서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던 나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서장의 사무실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아무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에 들어갔던 부서장이 인차 나오면서 나더러 들어가 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장 찍는 일을 시켰는가 보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여 “옷은 왜요?”라고 했더니 앞에 섰던 보안원이 발길질을 했다.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어디라고 대들면서 지랄이야?”
“비판서에다 지장만 찍고 집으로 가라기에 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때립니까?”
“조용히 해! 여기는 죄인들을 가두는 구류장(유치장)이야. 한번만 더 소리치면 가만 안 둬!”

그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그 계호원(간수)은 내 옷에서 일체의 금속물들을 모조리 뜯어 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이 떨리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다시 옷을 입자 그는 나를 2호 감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야 감방장, 그 새끼 사람 죽인 살인자야. 교양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가 살인자라니 말도 안 돼. 그럼 삼촌이 정말 죽었단 말인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질 않았다. 예심(심문, 사전적 의미는 범죄사실 등을 밝혀내는 소송행위)을 받으면서 나는 삼촌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땅에 넘어지면서 바닥에 박혀 있던 뾰족한 돌에 머리를 찧어 병원에서 4시간 만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회와 반성의 모대김과 함께 5개월간의 예심과정을 거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145조 2항 <과실적 중상의 살인> 죄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삼촌의 사망 감정결과는 ‘차수막 뇌출혈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입술이 파랗게 되고 손등은 꽁꽁 언 채 나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국과 밥을 품 안에 넣어 보온하면서 보안서 철문 앞에서 장시간을 기다렸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면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편지로나마 위안의 글을 드려야겠는데, 쓰려고 펜을 드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새벽녘에 일어나서 쓰리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피곤한 터라 기상총소리와 함께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여 끝내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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