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석의 일기⑭] “우리들이 싫어졌나요?”

▲ 또 다시 둘만 남은 춘석 남매

1999년 3월 하순경에 우리들은 별안간 삶의 거처를 잃어버렸습니다. 박 할아버지와 최 할머니 집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그 날 아침 할아버지는 강한 어조로 “짐을 챙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설마 경찰이?”

나는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아무튼 더 이상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서운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희선이는 겁이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짐이라곤 가방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박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데리고 집 앞 큰길로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따라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큰길에 다다르자 할아버지는 택시를 멈추고 우리들을 택시에 태우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할아버지? 이유를 말해 주세요. 우리들이 싫어졌나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심기가 상한 얼굴로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차라리 큰 소리로 욕을 하고 화라도 내셨다면 우리들도 뭐라고 하소연할 수 있었을 텐데 그토록 냉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희선이도 완전히 힘이 빠진 모양으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습니다.

우리들이 쓰러지듯이 택시에 올라타자 할아버지는 운전수에게 요금을 주면서 “서시장(연길시의 번화가)까지 가 주세요”라고만 말씀하신 후 거칠게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차는 달리기 시작하자 그 때까지 아연하게 있던 우리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스쳐가듯 보였을 뿐입니다.

택시는 잠시 후 서시장에 도착하여 슬픔에 잠긴 우리들을 내려놓은 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일년하고 몇 개월만에 나와 희선이는 또 둘만 남겨진 것입니다.

영문을 몰라,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눈물이라도 흘리게 된 것은 김 아저씨한테 전화를 해서 곧 데리러 오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박 할아버지나 최 할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 아저씨께서 항의를 하러 갔다 오셨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제 더 이곳에 있는 것은 무리다”라고만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조선족 사람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까 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98년 말부터 갑작스럽게 북조선 사람들에 대한 중국정부의 단속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연길 시내를 순찰하는 경찰의 수도 눈에 띄게 많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지금까지 친절했던 조선족 사람들의 태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아저씨의 말로는 그동안 조선족 사람들이 북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있어준 것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북조선의 식량사정이 좀 나아져서 북조선 사람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으로 도망쳐오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날 뿐인데다 경찰의 단속은 더욱 심해지자 이제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 한계에 도달하였던 것 같습니다.

냉정한 태도를 취한 것도 딱 잘라 헤어져야 되겠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에게 그런 이유를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와 희선이가 아직 어린애이긴 해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만약 그때 김 아저씨가 돌봐 주지 않았고, 경찰에 붙잡혀 북조선에 되돌아 갔다면 아마 지금쯤 나나 희선이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고, 박 할아버지와 최 할머니의 심한 처사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상상만 해도 무서워서 오금이 떨릴 지경입니다. 사람을 저주하면서 죽는다는 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습니다. 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는지, 그것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The DailyNK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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