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 “납북 中여성, 北에서 직접 만났다”

▲ 中 납치여성「홍렝잉」의 신분을 확인한<일본피랍자 구출회>니시오카 부회장

◆월간조선 1월호는 영화배우 최은희 씨가 마카오에서 납북된 중국 여성의 신원을 확인한 사실을 독점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최씨는 『북에서 만난 「홍여인」이 1978년 마카오에서 납북된 「홍렝잉」이 틀립없다』고 말했다. 데일리NK는 외국인 납치 사실을 특종보도한 이번 기사를 월간조선의 양해를 얻어 게재한다. 다음은 기사 全文.

<일본인 납북자 구출회>의 부회장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 力)씨가 지난 12월7일 月刊朝鮮을 찾아왔다. 니시오카씨는 1978년 7월 마카오에서 납치된 「홍렝잉(孔令·당시 20세)」이라는 여성이 崔銀姬-申相玉씨의 수기 「내레 김정일입네다」에 나오는 「홍여인」인지 확인하려고 한국에 왔다.

그는 月刊朝鮮에 崔銀姬씨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니시오카씨는 5명의 일본인 납북자와 그 가족들을 일본으로 송환시켜,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다.니시오카씨는 지난 12월13일 서울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80)씨를 만났다.

니시오카씨는 마카오 경찰에서 입수한 중국 여성 「홍렝잉」의 사진을 최은희씨에게 보여 줬고, 최은희씨는 『내가 북한에서 만난 「홍여인」이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1978년 마카오에서 납치된 홍렝잉

젠킨스의 手記가 불지핀 세여인 납치사건

1978년 7월2일 마카오에서는 중국 여성 2명, 태국 여성 1명이 동시에 실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중국 여성 「홍렝잉」과 「소묘춘(蘇妙珍·당시 22세)」은 「타이 풍」이라는 보석상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함께 납치된 태국 여성인 「아노차 판조이(당시 24세)」는 「에스토릴」 호텔에서 마사지사로 일하고 있었다.

세 여인은 「후쿠다」라는 이름의 일본인 사업가와 함께 있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사라져 버렸다. 마카오 경찰은 3년간 수사를 벌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고, 세 사람을 「단순 실종」으로 처리했다. 이후 세 사람은 마카오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 세 여인이 실종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납치됐다는 사실은, 2004년 7월 일본으로 정착한 미군 탈영병 찰스 젠킨스(65)씨의 고백 수기에 의해 확인되기 시작했다.젠킨스는 2005년 일본에서 출간한 수기 「告白(고백)」에서 마카오에서 납치된 세 여인 중 한 명인 태국 여성 아노차 판조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던 아노차 판조이씨는 『1978년 마카오에서 납치될 당시 다른 여성 두 명이 더 있었다』고 젠킨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젠킨스가 북한에서 경험을 회고한 책 ‘고백’

젠킨스의 증언

<1980년대 나와 아내가 살던 평양 시내의 아파트에는 우리 외에도 납북된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특히 태국인 여성 「아노차 판조이」씨는 우리 부부와 친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월북한 駐韓미군 출신 미국인 「래리 애브셔」와 결혼했다. 내 친구이자 아노차씨 남편인 래리는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노차씨는 몇 번 만난 후 자신은 1978년 여름 근무하고 있던 마카오에서 강제로 보트에 태워져 북한에 납치됐다고 했다. 납치됐을 때, 일본인으로 가장한 두 명의 동양인이 있었고, 20代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중략) 아파트에는 태국 여성 판조이씨 이외에 루마니아와 레바논에서 납치돼 온 여성 2명이 살고 있었다. 이 두 여성 모두 월북한 駐韓미군 병사와 결혼했다>

일본 외무성은 젠킨스씨의 수기와 증언을 토대로 북한에 의한 태국 여성 피랍 사실을 즉각 駐日 태국대사관에 통보했다. 아노차 판조이의 오빠가 나타나 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노차 판조이가 마카오에서 납북됐다」는 젠킨스의 증언은 흔들릴 수 없는 진실이 됐다.

니시오카씨는 2005년 11월9일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아노차 판조이의 가족을 만났다. 아노차의 오빠인 「스캄 판조이」씨는 니시오카씨에게 『(아노차 판조이의) 아버지는 2005년 9월 세상을 떠났고, 죽기 전까지 실종된 아노차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崔銀姬씨의 기억

니시오카씨는 마카오 경찰청에서 확보한 실종 중국 여성 「홍렝잉」의 사진을 들고, 崔銀姬씨를 찾아온 것이다. 崔銀姬씨가 1987년 일본에서 발간한 수기에 등장하는 「홍여인」의 신상정보가 「홍렝잉」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 12월13일 崔銀姬씨와의 면담을 끝낸 니시오카씨를 만났다.

―崔銀姬씨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사진의 주인공이 내가 북한에서 만난 중국 여성 미스 홍이 거의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거의 틀림없다’면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까.

젠킨스의 수기 내용, 젠킨스 부인 소가 히토미의 증언, 홍콩·일본 언론의 보도내용을 상세히 알려드렸더니, 헤어질 무렵에는 ‘틀림없이 미스 홍’이라고 하시더군요. 崔銀姬 선생이 ‘홍여인’에 대해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홍여인의 신상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던가요.

미스 홍의 아버지가 대륙에서 대학교수를 했고, 어머니와 홍씨 남동생만 마카오로 피란했다’, ‘홍씨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대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동생을 대학 보내려고 보석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부업으로 관광 안내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 선수였다’, ‘미스 홍이 가톨릭 신자였고, 전형적인 중국 미인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홍여인이 홍렝잉임을 확신하는 최은희씨

崔銀姬씨가 전한 ‘미스 홍’ 납치과정

―수기를 보면 崔銀姬씨가 「홍여인」을 만난 게 1979년입니다. 30년 가까이 된 일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崔銀姬 선생은 납북된 지 1년 뒤에 ‘홍여인’을 만났습니다. 납북된 지 얼마 안 돼 상당히 심리적으로 불안한 때였습니다. 崔선생은 ‘당시 미스 홍이 동생 같기도 하고 비슷한 수법으로 납치돼서 몇 달 동안 혈육처럼 지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崔銀姬씨는 일본에서 발행된 자신의 수기(1987년 발행)에서 「미스 홍」(홍렝잉)을 처음 만난 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1979년 초여름, 6월경 언제나처럼 산보를 하러 나와 잠시 걸어가다 보니 멀리서 젊은 여성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봤다. 퍼머 웨이브가 없는 단발머리가 우선 눈길을 끌었다.

그 일대에는 그런 헤어 스타일의 여성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북조선의 여성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다시 살펴보니 눈꼬리가 약간 치올라간 모습 때문에 전형적인 중국 미인으로 보였다.

키는 165cm 정도. 직감적으로 그녀도 나처럼 납치되어 온 여성인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서로 뚫어지게 쳐다본 후 서로 인사를 나눴다.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의사소통은 충분할 정도였다.

내가 먼저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봤더니 ‘중국인인데 마카오에서 왔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숲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한국어를 잘하는데 어디에서 배웠냐’고 하니까 ‘북한에 와서 배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나를 안다고 했다. 마카오에서 내가 나온 신문 기사를 보고 내가 유명한 영화배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崔銀姬씨는 이번 면담에서 니시오카씨에게 ‘미스 홍’으로부터 들은 납치과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니시오카씨가 전한 미스 홍의 납치과정이다.

『(미스 홍 말에 의하면) 1978년 여름 미스 홍이 일하던 보석점에 30세 정도의 청년 둘이 찾아와서 관광안내를 의뢰했다. 그녀는 며칠간 시내 이곳저곳을 안내하면서 그들과 함께 돌아다녔는데 그들은 가이드料를 좀 많이 지불하고 돈도 잘 썼다. 두 명 모두 일본인이라고 했으며 대단히 유복한 가정의 아들처럼 행동했고, 영어 구사도 상당히 능숙했다.

어느 날은 해안을 안내해 달라고 해서 해안에 갔더니 처음 보는 여성 한 명을 소개해 줬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자신보다 열 살쯤 연상으로 보였다. 네 명이 함께 해안을 몇 번 돌아다니다가 앞바다 쪽으로 나와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큰 배에 억지로 태우더니만 북한에까지 오게 됐다』

‘미스 홍’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 탈출 시도

‘미스 홍’의 납치 이후 북한 생활은 崔銀姬씨의 수기에 잘 나와 있다.

‘미스 홍’ 이 울면서 말했다. 납치된 후 평양 시내 어느 초대소에서 생활했으며 시내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줬는데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다고 했다. 탈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내 관광 도중 우연히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그래서 함께 납치된 여성과 몰래 초대소를 빠져나와 대사관으로 뛰어들어 구조를 요청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그들의 말을 들은 후 잠시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더니만, 곤혹스런 표정을 보였다고 했다. 이어 잠시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뭔가 소곤소곤 거리더니 ‘유감스럽지만 우리와 국적이 다른 당신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는 그들을 북한 사람들에게 인도해버렸다고 한다.

미스 홍은 북한 사람들이 왔을 때 체념하고 따라가려고 했지만, 나이트클럽 출신의 다른 여성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금속성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녀의 발버둥도 소용없었고 그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홍씨는 이후부터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홍씨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후부터 몇 번인가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崔銀姬씨의 분노

崔銀姬씨는 수기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홍양의 말을 들으며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같은 민족의 인간을 납치하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 사람까지 납치해 온다는 것은 악랄, 그 이상이다. 천벌을 어찌 받을 것인가?

崔씨는 수기에 홍씨와 헤어졌을 때의 상황도 기록했다.

그 후에도 우리들은 산보 나가는 길과 시간을 맞추어서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했다. 미스 홍과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나 3, 4개월이 지났는데, 갑자기 그녀와 헤어지게 됐다. 정확히 1979년 9월20일 내가 다른 장소(白頭山 초대소)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사이 肉親과 같은 정을 느낀 우리 둘이서 헤어지기 전날, 손을 맞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스타킹과 화장품 몇 종류인가를 건네면서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헤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 崔銀姬씨가 1979년 9월 이후로는 「홍여인」을 만나지 못한 건가요.

예, 자신들이 1986년 탈북할 때까지 소식도 한 번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니시오카씨는 『崔銀姬씨의 수기와 증언을 종합하면, 「홍여인」이 「홍렝잉」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니시오카씨는 『홍여인의 오빠가 「崔銀姬씨가 동생이 북한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취해 왔다』며 『곧 마카오로 가서 홍여인의 동생을 만날 계획』이라고 했다.

니시오카씨는 세 여인 중 아직 가족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홍여인의 친구 「소묘춘」의 신원 확인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니시오카씨는 『홍여인의 가족이 나타난 만큼 소여인의 가족을 찾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했다.

니시오카씨와 일본인 인권운동가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에 의해 自國民(자국민)이 납치된 나라는 일본과 한국을 포함 태국·마카오·레바논·루마니아·요르단·말레이시아·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 11개국에 이른다.

외국인 납치 명령자는 金正日

유엔총회는 2005년 11월17일 「북한 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은 이 결의안에서 북한에 의한 외국인 납치를 「조직적인 인권침해」로 규정했다. 니시오카씨는 북한 공작원들이 全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국인 납치행각을 벌이게 만든 주범이 金正日이라고 지적했다.

『金正日은 1974년 金日成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됐고, 1976년 해외공작 담당부서인 「3호청사」를 접수했습니다. 金正日은 고참 간부들에게 자아비판을 시키고, 「현지화 교육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은 현지화 교육 요원으로 써먹기 위해서 全세계에서 외국인을 납치해 왔습니다.

1970년대 말에 외국인 납치가 집중돼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북한으로 간 적군파를 유럽으로 보내 그곳에서 일본 민간인을 납치해 가기도 했습니다. 金正日은 당시 「세계 赤化(적화)」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30년 전에 저지른 외국인 납치가 오늘날 이런 엄청난 국제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