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후 31년 만에 탈북해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최욱일(67)씨는 천신만고 끝에 북.중 국경을 넘었다.
4일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해 12월22일 자신이 농장원으로 있던 함경북도 김책시 풍년리에서 화물차로 함경북도 혜산까지 이동한 뒤 25일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 중국 창바이(長白)에서 옌지(延吉)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눈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이마에 8바늘을 꿰맸으며 은신처에 도착하기까지 10여 개의 검문소도 통과했다.
최씨는 1975년 8월8일 오징어잡이배 ‘천왕호’ 사무장으로 동해에서 어로 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당시 최씨를 포함해 33명의 선원이 납북됐지만 1999년까지 정부의 납북자 명단에는 선장 김두익씨만 올라 있었다.
천왕호 선원들의 납북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납북어부 최일씨와 고명섭씨의 편지가 중국을 통해 남한에 전해지면서부터. 2000년 이들의 편지가 통일부에 전해지면서 천왕호 선원 32명의 이름이 납북자 명단에 올랐다.
당시 최씨는 남한에 있던 형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북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후 최씨의 동료 고명섭씨가 2005년 탈북 후 입국, 천왕호의 납북 전모가 드러났다.
고씨는 4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1980년대 중반 평안남도 신양에서 최씨를 만난 적이 있고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며 “북한 당국의 감시가 심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간접적으로 전해듣는 정도였다”고 밝혔다.
고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1975년 피랍 직후 천왕호를 압수했으며 선원들은 1년 간 원산 62연락소에서 ‘사회적응 교육’과 정치 학습을 받아야 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려가면 모두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고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귀환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이나 자살 소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적응교육 후 북한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김책시에서 농장원으로 일하게 된 최씨는 당국의 감시 속에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납북자가족모임 측은 2001년부터 8차례에 걸쳐 ‘협력자’를 보내 그의 탈북을 시도했지만 최씨는 ‘자신을 떠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4차례나 보위부에 신고했다.
그러던 최씨는 지난해 9월 아홉번째 자신을 찾아와 탈북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탈북의사를 타진하는 이들에게 “남녘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써오면 믿겠다”고 말했고, 부인 양정자(66)씨가 써보낸 1남3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받아본 뒤 “나올(탈북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25일 중국으로 나와 이튿날 오후 서울에 있던 부인 양씨와 31년 만에 통화했으며 같은 달 31일에는 옌지의 은신처에서 상봉, 3일을 같이 지냈다.
최씨는 현지에서 주 선양(瀋陽) 한국총영사관에 전화해 신변안전과 한국으로 송환을 요청, “연락을 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상태다.
한편 정부는 지난 12월26일께 납북자단체로부터 최씨의 탈북 사실을 통보 받고 중국 정부에 송환을 위한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