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해, 장성택 뛰어넘나…김정은, 최에 크게 의존

현재 북한의 파워 엘리트 중 김정은 제1비서의 고모인 김경희와 고모부인 장성택을 제외하고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단연코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의 북한 지도부에서의 ‘특별한 위상’과 역할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최룡해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을 보면 과거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그를 정치적으로 키웠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최룡해를 ‘장성택의 사람’ 또는 ‘장성택의 최측근’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이 같은 주장은 역사적 사실 및 실상과 괴리되어 있다.


‘혈통’이 중시되는 북한체제에서 최룡해의 ‘특별한 지위’는 무엇보다도 그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백두산 혈통’ 다음으로 중시되는 항일빨치산 혁명가계에 속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최룡해의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친 최현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항일빨치산 경력  


최현은 1907년에 독립군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에 손에 총을 잡고 독립군을 따라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가정환경 때문에 최현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했고 그것이 이후 항일빨치산 그룹에서 그가 초기에 지도적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 한계로 작용한다.

최현은 중국 훈춘(珲春)현에서 성장하면서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1925년 11월 변절자의 밀고로 군벌에 의해 체포되어 약 7년간을 옌지(延吉) 감옥에서 보냈다. 최현이 감옥에 있었던 1931년 9월 만주사변(9·18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국민당 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의 전개를 호소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동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 창건을 결정했다. 최현의 원래 이름은 최득권이었으나 1932년 7월에 감옥에서 만기출옥하면서 이름을 최현으로 고쳤다. 이 같은 변명(變名)의 사용은 당시 항일투쟁을 하던 인사들이 가족들과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채택하던 방법이었다. 최현은 옌지현에서 적위대에 입대하고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했다.

현재 북한 문헌들은 최현이 감옥을 나온 직후인 1932년 8월 김일성이 영도하는 유격대에 입대했고, 이후 계속 김일성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32년에 최현은 옌지현 유격대대에, 김일성은 안도유격대 그리고 왕청현유격대대에 참가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최현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1933년 9월이었고, 이후에도 1940년 소련으로 피신하기 전까지 최현과 김일성은 각기 다른 부대에서 활동했다. 1936년에만 해도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 사장(師長)을 맡고 있을 때 최현은 제1사 제1단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일성 소속 부대와 최현 소속 부대가 수시로 일본군에 대한 공동 공격작전을 진행했기 때문에 최현은 김일성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항일투쟁시기 최현의 지명도와 리더십의 한계

1937년 5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4사는 안도현에 도착해 안도현 경찰대의 악명 높은 이도선 부대를 격파하고, 만주와 조선을 가르는 두만강을 건너 동월 15일 밤 함경북도 무산군의 한 촌락을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했다. 이것이 최현 비(匪)의 소행으로 보고되어 최현의 이름은 일약 유명해졌다. 1937년 6월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6사가 함경남도 보천보를 공격했는데 이 전투는 국내의 각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김일성 일파와 최현 일파 300명’이 감행한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최현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항일무장투쟁 당시 최현의 위상은 김일성보다 낮았지만 일제는 최현을 매우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관동군 토벌대는 김일성을 ‘호랑이’, 최현을 ‘사자’라는 은어로 표현하고, 김일성과 최현에 대해 같은 금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최현이 무식하고 리더십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의 용맹성에 대해서는 일제도 두려움을 가지고 대했던 것이다.

1939년 말부터 일제가 매우 강력하게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1940년 말 최현을 포함해 동만 지역의 항일빨치산들은 소련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2년 7월 중국과 조선의 항일빨치산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일명 88여단)가 결성되었다. 이 때 조선인 중 김일성, 안길, 김책, 강건, 최용건은 대위 계급을 받았으나 최현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상위 계급을 받았다. 항일빨치산 그룹에서 최현의 리더십은 지명도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김책, 안길, 최현, 김일과 함께 소련군함 ‘뿌가쬬프’호로 원산항에 상륙했다. 최현의 부인 김철호도 1945년 11월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과 그의 아들 김정일과 함께 귀국했다. 김철호도 김정숙과 같은 항일빨치산 여전사였다.


6·25전쟁 이후 최현의 군부 실세로의 부상 


6·25전쟁 시기 최현의 활동에 대해 북한은 그가 “인민군 제2보병사단장, 제2군단장으로 경애하는 수령님(김일성)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남진의 첫 대오에서 수많은 전투들을 조직지휘하여 미제침략자들을 낙동강 계선까지 몰아내고 남반부의 광활한 지역을 해방하는데 이바지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업적을 배경으로 최현은 1956년에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됨으로써 당시 북한을 이끌어가는 약 70명 정도의 파워 엘리트 그룹에 진입하게 되었다. 1966년에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후에 ‘정치국’으로 명칭 변경됨) 위원에 선출됨으로써 약 10명 정도의 핵심 파워 엘리트 그룹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최현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민족보위상을, 그리고 민족보위성이 인민무력부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1972년부터 1976년까지는 인민무력부장 직을 맡았다. 최현은 1982년 만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북한 문헌은 그가 김정은이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처음 맡은 직책인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의 과거 명칭인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중책도 맡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최룡해에 대한 김정일의 특별한 신임  

1950년생인 최룡해는 어렸을 때부터 김정일을 ‘형’, 김경희를 ‘누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이 최현의 충성심과 용감성을 높이 평가했고, 최현이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받드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김정일이 최룡해를 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서방세계에서는 과거 최룡해가 장성택 밑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최룡해가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라는 당내 중요 지위에 선출된 것은 장성택보다 6년 앞선 1986년 12월이었다. 그는 만 36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북한을 움직이는 100명 내외의 최고 엘리트 그룹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최룡해보다 4살이 더 많은 장성택은 1992년 12월에 가서야, 만 46세의 나이에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처럼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라는 핵심 지위에 최룡해가 장성택보다 먼저 선출되었기 때문에 장성택이 최룡해를 정치적으로 키웠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최룡해는 동맹원 수가 약 500만 명이나 되는 북한 최대조직인 청년동맹의 최고책임자 직책을 1986년부터 1998년까지 약 12년간이나 맡았는데, 이는 청년동맹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최룡해는 1998년 1월 ‘청년동맹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청년동맹 중앙위원회 1비서직에서 해임되고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비서로 좌천되었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후임자 선출 보도로 전임자의 거취를 알려왔는데, 당시 최룡해를 ‘신병관계’로 해임한다고 이례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그에 대해 특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최룡해는 김정일의 신임을 회복해 2003년 8월에 당중앙위원회 총무부 부부장으로 기용되었다가 2006년 4월에는 황해북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직에 임명되었다.

2010년 9월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룡해는 김정일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국, 당중앙군사위원회라는 당의 3대 주요기구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 및 체제의 2인자로서 대외적으로 모습을 처음 드러낸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국 그리고 군사위원회에 모두 선출된 인물은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뿐이었다. 따라서 최룡해가 당의 3대 주요기구에 모두 선출된 것은 그에 대한 김정일의 특별한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최룡해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모두에서 장성택 바로 앞에 호명되었다.


김정은의 최측근 및 군부 1인자로의 부상

북한은 최현의 사망 30주년이 되는 2012년 4월 9일의 바로 전날인 8일 로동신문 4면의 지면 절반 이상을 최현에 할애하면서 그에 대해 ‘자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몸에 배인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최현이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를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받드는 데서도, 주체혁명위업 계승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당의 영도체계를 튼튼히 세우는 데서도 언제나 앞장에 섰고 견결하였다”고 지적함으로써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에 대한 최현의 충성을 높이 평가했다.


4월 10일자 로동신문은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한지 19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중앙보고대회가 9일 개최되었다고 보도하면서 최룡해를 총참모장인 리영호보다 먼저 호명했다. 이는 최룡해가 최현 사망 30주년이 되는 4월 9일이나 그 전에 군부의 제1인자 직책인 총정치국장 직에 임명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4월 10일 최현 서거 30주년 중앙추모회를 개최하고, 4월 11일자 로동신문 5면 전체에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4월 10일 최룡해에게 차수 칭호를 수여하는 결정을 발표했다.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최현의 충성심에 대한 강조와 최룡해의 총정치국장 임명 및 그에 상응하는 군사 칭호 수여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최룡해는 군 복무와 조선인민군 청년동맹위원회에 대한 지도 외에 특별한 군 관련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후광 덕분에 총정치국장이라는 군부의 제1인자 직책에 임명될 수 있었다. 최룡해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에도 선출되었고, 과거 그의 부친 최현이 맡았던 것과 거의 동일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에도 임명되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최룡해의 위상은 김정일 시대보다 더욱 높아진 것이다.

2012년에만 해도 최룡해는 파워 엘리트 중 김정은 공개활동 수행 횟수에서 장성택에 이어 2위를 차지했는데, 2013년 상반기에는 장성택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것은 최룡해가 김정은의 최측근으로서 군부 장악과 경제건설 분야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룡해는 과거 자신의 부친 최현과 조명록 전 총정치국장처럼 김정은과 노동당에 대한 군부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요해’라는 특권적 권한을 가지고 군인건설자들이 동원되는 각종 기념관과 아파트, 공원, 체육시설 건설 및 대규모 축산단지 개간 현장 등을 빈번하게 방문해 감독함으로써 과거 김정일 시대에 장성택이 수도건설과 관련해 맡았던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등 중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만나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핵실험으로 악화된 북중 관계의 회복을 모색했다.

이처럼 최룡해 총정치국장에 대한 김정은의 의존도가 커지면서 현재 최룡해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 장성택이 누렸던 것과 같은 김정은의 특별한 신임과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최룡해는 과거 조선축구협회 위원장, 조선청소년태권도협회 위원장,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은 바 있다. 그의 이 같은 경력은 그가 체육 분야에서도 장성택이 현재 국가체육지도위원장으로서 맡고 있는 역할의 상당 부분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는 김정은이 앞으로도 장기간 북한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만약 수년 내에 갑자기 김정은의 유고가 발생한다면 최룡해는 장성택과 함께 차기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핵심 파워 엘리트 중 하나이다. 최룡해는 당조직의 충원조직인 청년동맹에서 무려 12년간이나 위원장 또는 1비서 직을 맡았기 때문에 당 내에 ‘최룡해의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최룡해가 차기 지도자로 되지 못하더라도 그가 군부 1인자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기 지도자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웠던 장성택도 2004년에 직무를 정지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군부의 제2인자였던 리영호가 2012년에 갑자기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된 것처럼 북한이라는 군주제적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최룡해도 하루아침에 직무 정지당하거나 해임될 수 있는 ‘수령의 제자 및 전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는 김정은이 어느 파워 엘리트보다 최룡해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고, 최룡해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확대되고 있으므로 향후 그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 장성택과 최룡해의 주요 경력 및 역할 비교





























































 


장성택


최룡해


생년월일


1946.1.22


1950.1.15 (장성택보다 4살 아래)


출생지


함북 청진시


황남 신천군


가족 배경


부친이 일제강점기 시대 김일성과 무관한 계열에서 항일투쟁.


김정일의 매제.


김정은의 고모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동료인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둘째 아들.


최룡해의 모친도 빨치산.


항일빨치산 혁명가계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러시아 유학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당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연도


1992.12


(46세의 나이에 선출)


1986.12


(36세의 매우 젊은 나이에 선출)


현재


핵심 직책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라선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위화도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조중공동지도위원회 조선측 위원장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


 


 


 


 


 


군 계급


대장


차수


과거


주요 경력


당중앙위 청년사업부 부부장 (1982.10)


당중앙위 청년사업부 제1부부장 (1985.7)


당중앙위 청년사업부장(1988.12)


당중앙위원회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 (1989.7)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1995.11)


당중앙위 제1부부장(2006.1)


당중앙위 행정부장(2007~현재?)


사로청 중앙위 위원장(1986.8)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 위원장(1989.1)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 1비서(1996.1~1998.1)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당비서 (1998)


당중앙위 총무부 부부장(2003.8)


황해북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2006.4~2010.9)


당중앙위 비서(2010.9~2012.4)


기타


주요 경력


 


조선축구협회 위원장(1990.10)


조선청소년태권도협회 위원장 (1990)


국가체육위원회 부위원장(1992)


김일성훈장


수훈


1992.4


 


1987.4


(장성택보다 5년 먼저 수훈)


2012년 김정은의


공개활동 수행 횟수


106


(파워엘리트 중 수행횟수 1)


85


(파워엘리트 중 수행횟수 2)


2013년 김정은의


공개활동 수행 횟수


25(624일까지)


(파워엘리트 중 수행횟수 5)


72(624일까지)


(파워엘리트 중 수행횟수 1)


현재


주요 역할


김정은의 ‘체육강국’ 건설 구상 지원


중 경제특구사업 관장


 


김정은에 대한 군부의 충성심 유도


군인건설자들을 동원해 각종 건물과 아파트, 공원, 체육시설 건설


※『 NK비전』의 동의하에 동 월간지 2013년 8월호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을 데일리NK 칼럼으로 동시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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