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신 월북, 북한 추석성묘 바꿔놨네

▲ 성묘하는 북한주민

북한에도 추석명절을 쇤다.

봉건 유교사상을 타파하던 60년대 북한에서 추석은 한식, 단오절과 함께 명절에서 사라졌다. 사회주의 생활문화 양식에 맞게 장례와 제사문화를 개조할 데 대한 당국의 지시에 따라 추석날에는 벌초나 하고 집안에서 가족끼리 제사를 지냈다.

그후 1972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이산가족들이 북한에 남겨둔 조상묘의 안부를 물어오면서부터 성묘가 차츰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노동당의 봉건유교사상 타파 노선에 균열이라도 생겼는가? 아니다. 묘를 둘러싼 남북관계의 미묘한 부분이 끼어 있기 때문이었다.

최덕신의 부친 묘소 참배가 계기가 돼

미국에 망명했던 최덕신 전 남한 외무장관이 방북 초청을 낸 것은 80년대 초였다. 방북 이유는 6.25전쟁 때 ‘납치, 피살된’ 부친 최동오의 묘소를 찾아 제를 지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최덕신은 부친이 전쟁 때 피살된 줄로 알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백골부대’연대장으로 북한군과 대적했던 최덕신은 자신이 평양에 들어서는 순간 ‘능지처참 될 것’을 각오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화성의숙'(2년제 독립군 간부학교)의 제자였던 김일성의 배려로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집행위원을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반공사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부친의 묘와 북한정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난 최덕신은 그 이후에도 평양을 여러 번 방문하여 김일성의 접견을 받고 나중에는 미국국적을 포기하고 북한에 영주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86년 4월 부인 유미영과 함께 월북한 최덕신은 김일성을 ‘민족통일의 구심점’으로 다시 본 회고록 <민족과 나>를 집필했다. 최덕신은 책에서 김일성을 ‘민족의 주체’로 찬양했다. 이를 형상한 북한영화 <민족과 운명>도 있다.

최덕신의 모습을 보고 북한은 묘소를 남기고 월남한 이산가족들을 더 많이 흡수하고 향후 남북간 교류가 활발해질 것으로 계산하고 주민들에게 성묘를 허가한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명절에 비하면 족탈불급

주민들에게 산소를 찾도록 허용했지만 통행증 제도가 나오면서 조상을 찾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몇 해 동안 찾아보지 못해 잡초가 키를 넘고, 봉분이 낮아져 조상의 묘를 잃어버리고 남의 묘에 가서 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주 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앞에서는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뒤에서는 ‘불효자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3대 민속명절(음력설, 단오, 추석)을 공식명절로 다시 제정한 것은 1989년부터다. 공식명절 제정이 있은 후 추석 당일 날 평양과 국경지대를 뺀 지방은 통행증 없이 다니게 됐다. 추석날은 일요일로 대체했다. 만약 추석날이 일요일이 아닌 평일이면 추석날 쉬고 일요일 날 직장에 출근했다.

북한에서는 배급이 많이 나오는 날이 최대 명절이다. 특별배급을 주는 설날(1.1), 김일성 생일(4.15), 김정일 생일(2.16), 국경절(9.9), 당창건(10.10)에 비하면 추석은 족탈불급이다.

북한주민들은 추석날을 한해 지은 햇곡식으로 정성껏 음식을 지어 조상을 찾아보는 날로 여기고 있다. 청신한 가을 날, 산에 올라 술도 마시고 조상에 대한 덕담도 나누고, 가족들 사이에 우의를 두터이 하는 추석은 주민들이 지친 마음을 푸는 손꼽아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하다.

추석음식도 명암이 갈린다

명절음식은 돼지고기를 썰어 계란을 부친 부침개, 통닭, 녹두전, 팥전, 찰떡, 송편과 고사리채, 콩나물 등 산채와 밤, 대추도 함께 상에 올린다. 아무리 없어도 사과와 배 등 몇 개는 마련한다. 조상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위주로 올리는 것이 효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에 따라 생활이 좋은 사람들은 잘 차리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쌀밥 한 그릇 마련하기도 어렵다. 일반 주민들은 술 한 병과 밥 한 그릇만 싸가지고 산소로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추석날 산에 오르기 전에 먼저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묘가 있는 산에 오른다. 묘소 주변을 벌초하고, 장남이 먼저 술을 붓고, 잇따라 손자, 증손자들을 차례로 절을 시킨다. 며느리와 딸들은 제외된다.

묘소 주변에 가장 가깝고 오래된 소나무나 바위의 밑을 파고 음식물과 술을 묻어놓는 풍습도 있다.

2000년대에 들어 북한전역에 도로와 기차길이 가까운 곳의 묘소들은 평토(平土)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봉분을 땅과 평평이 낮추고 비석을 눕히라는 지시가 내려져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봉분을 낮출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제시하고, 시한을 정해 고치지 않은 세대주들을 처벌하고 집단적으로 평토했다. “묘지가 많으면 장군님(김정일)께서 심려하시고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어간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2년 사이, 고속도로와 기찻길이 보이는 산에는 봉분 있는 묘소가 사라졌다.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