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존엄’…北주민들 사이에서 유행어 됐다



▲김정은 정권 출범 직후 김정은의 첫 번째 생일(2012.1.8)을 맞아 북한 TV가 방영했던 김정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 선군정치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전차에 탑승한 김정은을 소개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촬영자가 최고지도자를 내려보는 구도는 북한에서 금기시되는 촬영법이다. 이 화면에서 김정은의 모습은 ‘최고사령관’의 이미지보다는 ‘하급병사’ 이미지에 가깝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김정은에 대한 호칭으로 ‘최고존엄’이라는 단어가 유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의주 소식통은 15일 데일리NK와 통화에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원수님'(김정은)이라는 표현보다 ‘최고존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북한은 우리 언론이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신상을 보도할 때마다 ‘최고존엄 모독’이라며 반발해왔다. ‘최고존엄’은 북한의 대남 위협용 ‘프로파간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다. 자신들의 매체에 “남조선 언론들이 김정은 동지를 헐뜯었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을 사용할 경우, 이마저도 김정은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김정은’을 ‘최고존엄’이라는 추상명사로 대신해 왔던 것이다.

지난 14일 북한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데일리NK와 일부 우리 언론이 구두를 신은 채 북한 고아원 실내를 방문했던 김정은의 행태를 지적했던 것을 두고 “최고 존엄을 악랄하게 헐뜯는 참을 수 없는 망동짓을 하였다”고 반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이 사용하는 ‘최고존엄’이라는 단어는 그 뉘앙스가 묘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주민들은 “오늘은 최고존엄이 어디를 갔었나?” “이번에 최고존엄이 00에서 행사를 조직했다더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식통은 주민들이 사용하는 ‘최고존엄’이라는 단어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주민들이 ‘최고존엄’을 김정은에 대한 비칭(卑稱)으로 사용하게 된 시점은 지난해 12월 장성택 숙청 이후로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대남용 은유(metaphor)였던 ‘최고존엄’을 내부용으로 돌렸던 것이 발단이었다.

북한은 장성택 처형 직후 내부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주민들에게 ‘4대 지침’을 하달했다. 우리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가 ▲최고존엄 훼손 금지▲기독교를 비롯한 각종 미신행위 금지 ▲마약 금지 ▲한국 드라마 등 불순 녹화물 시청 및 유포 금지 등에 4가지 금지사항을 제시하며 “위반 시 엄벌에 처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당시 4대 지침에서 “원수님(김정은) 최고존엄 훼손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능지처참할 것”이라는 내용이 첫 자리를 차지했다. 소식통은 “우리 방송이나 신문에서 ‘남조선이 우리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는 말이 자주 나오긴 했으나, 백성들에게 ‘최고존엄을 훼손하지 말라’고 포치가 내려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북한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김일성 1인 권력과 김정일 후계구도를 확립하면서 ‘당(黨)의 유일사상 10대원칙’을 통해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유지해왔다. 10대원칙은 북한의 법체계를 초월하는 효력을 갖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북한 형법에는 최고지도자 모독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최고지도자 모독은 10대원칙만 적용해도 즉각 처형이나 정치범수용소 구금이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입법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지난해에는 김일성에 대한 충성 의무를 골자로 하던 기존의 10대원칙이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의무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10대원칙으로 개정됐다. 새로운 10대원칙은 총 10조 60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항은 ‘~해야 한다’로 종결된다. ‘~하면 안 된다’는 식의 문장은 없다.

따라서 인민보안부가 ‘최고존엄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형식으로 주민들을 교양했던 것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생소한 프로파간다 방식었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누군가 김정은의 존엄을 모독하고 있으니까 ‘모독하지 말라는 지침이 나온 것 아니냐’는 관측도 가능하다.

소식통은 “인민보안부 지침이 내려온 이후 간부들 사이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이 흔하게 돌다가 결국 백성들 입에도 ‘최고존엄’이라는 말이 붙게 됐다”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최고 존엄 옆에 저 사람은 누군가’라는 식으로 농담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최고존엄이라는 말이 국가에서 먼저 쓴 말이니까, 백성들이 최고존엄, 최고존엄 해도 보안원들이 시비 걸 구실이 없다”면서 “농담으로 최고존엄을 사용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말을 쓰지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 말을 더 써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주민들 사이에서 김정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은 “작년까지만 해도 아동 그림영화 ‘소년장수’에 빗대어서 ‘쇠매장수’라는 (김정은에 대한) 별칭이 유행했다”면서 “원수님에 대해서는 수령님(김일성), 장군님(김정일)처럼 입에 딱 붙는 존칭어가 아직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는 ‘소년장수’는 외적(外敵)과 내부간첩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주인공 소년 ‘쇠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쇠매’는 ‘쇠 몽둥이’라는 뜻이다. 함경북도 국경지역 주민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국경통제와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것에 불만을 두고 김정은을 ‘쇠매장수’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 이 소식통의 설명이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기 전까지 ‘샛별장군’ ‘청년대장’ 등의 호칭으로 불리다가, 2010년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 한동안 ‘존경하는 대장 동지’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상황에 따라 ‘원수님’ ‘장군님’ ‘동지’ ‘각하’ 등 여러 호칭을 쓰고 있다.

이런 이유인지 지난 2월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나선 북측 가족들 사이에서도 호칭의 산만함이 엿보였다. 당시 북측 가족들은 김정은을 지칭할 때 ‘장군님’ ‘원수님’ ‘지도자 동지’ 등 다양한 호칭을 사용했다. 딱히 틀린 호칭도 없었지만, 김정은이 금방 떠오를 만한 호칭도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호칭으로만 놓고 본다면, 3대 부자세습과 어린 나이라는 김정은의 핸디캡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개인 우상화에 관해서는 ‘현존 최고’로 평가받는 북한의 선전선동 기술이 초라해 보일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