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과 용천, 사건보도 하늘과 땅

▲ 지난해 4월 폭발사고가 있었던 용천군의 최근 모습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작년 4월에 발생한 용천 대폭발 사고일 것이다.

이 사건은 1986년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를 연상시키면서 구소련 체제와 와해와 북한의 수령왕조 체제의 몰락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데 관심이 모아진 것 같다.

1986년 4월 28일 소련 방송은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에프시 북쪽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 유출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로부터 18년 후인 2004년 4월 24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는 용천에서 열차폭발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수십년 동안 내부에서 발생한 참극을 되도록 은폐해왔다. 그러나 이 두 참극은 대외적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체르노빌 사건이 소련의 개혁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용천사건도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고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제 배경을 보면 체르노빌의 참극과 용천의 참극은 거리가 멀다.

구소련 매체 사건사고 은폐, 대형사고는 복구중심 보도

소련에서 발생한 참극이 당국자에 의해 은폐되어 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대 초까지 소련 매체는 여러 사건을 별문제 없이 보도했다. 그러나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강해질수록 이런 사건에 대한 보도는 차츰 소련 신문에서 없어졌다.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체제가 완벽하다고 주장한 소련매체는 스탈린의 ‘지상낙원’에서 교통사고나 자연재해조차 없는 듯이 말했다. 어떤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면 ‘외국 간첩’이나 ‘인민의 적들’에 의해 야기되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벽한(?) 지도를 받는 나라에서는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같은 이유로 스탈린 시대에는 추리소설이나 추리영화가 없었다. 1920년대 활발했던 소련식 추리소설은 1930년대에 들어와 사실상 금지되었고, 스탈린 사망후 1950년대 말 일부만 재등장했다. 소설문학에서도 범죄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이 드물었으니, 더욱이 범죄사건 수사를 중심으로 하는 추리소설은 말도 안 되었다.

물론 사건의 규모가 너무 커서 해외에 알려진 이유로 소련당국이 은폐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좋은 사례가 소련 역사상 최악의 재난인 1948년의 아시가바트 (Ashgabat) 지진이다. 사망자 수가 5-10만 명에 달한 이 참극은 도저히 숨길 수 없어 예외적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시가바트 지역에 지진이 있었고, 파괴가 심해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는 식으로 너무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그 외에 아무런 다른 정보도 없었다. 이후 소련매체는 지진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아시가바트로 가는 원조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보도했다. 외부에 은폐하지 못할 사건이 일어날 경우, 소련매체는 늘 사건 자체보다 복구사업을 중심으로 보도했다.

스탈린이 살았을 때는 이처럼 은폐하지 못할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후 소련매체는 방향을 다소 바꾸어 ‘외국간첩과 상관이 없는’ 사건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다 많은 사건사고를 보도했다.

그래도 1960~80년대까지 보도의 원칙은 스탈린 시대와 비슷했다. 중소규모의 사건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사망자가 아주 많거나 사건이 해외에 알려질 경우 사건 자체를 간단히 보도했다. 그리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만 자세히 언급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나라에도 재난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완벽한’ 소련사회는 재난을 누구보다 빨리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였다.

체르노빌 사고 계기 소련매체 변화

한편, 여러가지 국제관계적인 이유로 은폐하기 어려운 문제도 보도는 되었다. 예를 들면 1979년 4월, 스베르드롭스크(Sverdlovsk) 시의 ‘미세 생물학무기연구소’ 주변지역에서 괴질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며칠 후 ‘미국의 소리’ 방송(VOA)은 이 사건을 ‘생물무기 연구’와 관계있는 사건으로 보도했다.

결국 한참 뒤에 밝혀졌지만 정말 생물무기와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매체는 국제조약을 무시하면서 생물무기를 개발한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자생적으로 생긴 전염병’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각종 범죄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원칙은 계속되었다. 추리소설이나 추리영화는 가능해졌지만, 실제 범죄사건에 대해 소련매체를 통해 배우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범죄는 재난보다 사망자 수가 그리 많지 않고,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같은 언론문화에 익숙한 소련 사람들에게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해외 언론에서는 체르노빌 발전소 폭발이 소련의 몰락을 초래한 사건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물론 소련체제의 몰락 과정을 직접 목격한 필자로서는 그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체르노빌 사건이 소련 사람들에게 언론 자유화를 뚜렷이 보여준 것은 틀림이 없었다. 체르노빌 사건은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어차피 해외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스탈린 시대에도 은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너무 상세하니까 “자, 소련의 매체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용천폭발사고 北 보도, 체르노빌과 큰 차이

그러면, 용천 열차폭발 사건은 어떤가?

이 사건에 대한 북한의 보도를 보면 북한매체가 정말 바뀌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용천사고도 외부에 알려질 수밖에 없는 ‘폭발사고’였다. 북한당국이 은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사고가 발생한 이후 북한의 매체는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원조 사업’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나중에는 용천사고 현장이 잘 복구된 것을 외부에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는 북한당국이 용천사고에 대해 스탈린주의적인 접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소련매체의 보도와 북한의 매체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