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 ‘수재학교’ 재학중 비디오 보다 퇴학 당해

▲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

북한에도 영재교육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국가에서 선발하여, 남한의 과학고처럼 특별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교육한다. 필자도 북한에서 공부를 꽤나 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특별 고등중학교에 다녔다.

92년 인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3학년 때부터 따로 특별교육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의 특별 지도 아래 저녁 6시까지 수학, 자연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인민학교 4년을 마친 후 무산시 대표로 뽑힌 나는 96년 4월 청진 제1고등중학교(고중)에 진학했다. 제1고중은 평양과 각 도에 하나씩 있는 수재학교다. 평양 제1고중, 청진 제1고중(함북), 함흥 제1고중(함남) 식이다.

청진 제1고중에 가보니 나만큼 공부를 하는 애들이, 아니 더 뛰어난 애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특히 청진시 애들이 많았는데, 다들 집안도 받쳐주는 친구들이었다.

물론 나도 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민위원회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의사이신 어머니 같은 경우 정해진 월급은 적어도 훨씬 더 많은 수입이 있었다. 굶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꽤나 풍족하게 지냈고, TV나 냉장고 등 웬만한 가전 제품은 다 있었다.

고등중학교 시절 ‘땡땡이’치던 추억

소위 ‘백’이 든든하니 일반 고등중학교와는 달리 학생들이 ‘땡땡이’를 치거나 놀러 가는 일이 많았다. 일반 고등중학교 같으면 처벌을 심하게 하지만 우리들은 심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시내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분주소(파출소)에 잡혀가도 ‘청진 1고중’이라고 하면 봐줬다.

시험 기간이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애들끼리 바닷가로 자주 놀러 갔다. 한 번은 수업을 빼먹고 놀러 갔는데 땔감이 없어서 공책을 다 뜯어서 불을 지핀 적이 있었다. 그렇게 구워먹은 조개 구이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바닷가가 아니면 재래시장이 같은 곳에서 놀기도 했다.

기숙사 생활은 꼭 군대 같았다. 아침 6시가 되면 기상 나팔을 불었는데, 나가기 싫어서 이불 속에 누워있으면 경비원이 와서 깨웠다. 방 바깥에 자물쇠를 채워놓으면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검사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방에 있는데 바깥 자물쇠를 잠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후배한테 부탁해서 아침에 나갈 때 자물쇠를 잠그게 했다. 그런 날이면 계속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래도 매달 말에는 시험이 있어 열심히 공부했다. 시험 치기 10일 전부터 집중해서 공부를 했는데, 여름에는 해가 길어 야자(야간자율학습)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에는 해도 빨리 지고 전기도 없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겨울 기숙사는 난방도 되지 않아 최악이었다. 밥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니크롬선을 꼬아 만든 히터를 콘센트에 하나 꼽으면 그나마 어둡던 조명은 더 어두워졌고, 세 개를 꼽으면 퓨즈가 나갔다. 나중에는 화가 나서 퓨즈 자리에 숟가락을 끼웠는데 끊어지지 않고 잘 작동했다.

비디오 한 번 잘못봐서 퇴학당해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4학년 무렵이었다.

4학년이 된 후 99년 2월에 평양 제1고등중학교로 편입 시험을 쳤다. 좀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은 욕심에 시험을 봤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의 좌절로 한동안은 마음을 못잡고 놀러 다니기만 했고, 성적은 계속 하락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외국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99년도 8월쯤으로 기억한다. 친구 중에 회령에서 온 애가 한 명 있었는데, 방학을 이용해 친구 4명과 함께 그 친구 집으로 놀러가게 됐다.

친구 집에는 TV랑 비디오 기계가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그 집은 보위부의 요시찰 대상 중 하나였는데, 그 당시에는 그걸 생각지도 못했다. 그 친구 집에서 우리는 세 편의 비디오를 봤다.

한 편은 한국드라마, 다른 두 편은 외국영화였다. 한국 드라마는 ‘팔도 사나이’였고, 외국 영화는 ‘타이타닉’과 ‘식스 데이 세븐 나잇’이었다. ‘팔도 사나이’는 워낙 오래된 드라마여서 지금은 이곳 남한 사람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일제 시대 주먹 싸움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꽤나 재미있게 봤다.

‘타이타닉’이나 ‘식스 데이 세븐 나잇’도 충격이었다. 정말 재미있었고 외국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너무나 흥분돼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99년만 해도 외국 영화는 아직 북한 내에 별로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타이타닉’은 무삭제 원판으로 남녀 주인공이 차 안에서 벌이는 정사 장면까지 볼 수 있었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상에도 영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저렇게 배를 타고 갈 수 없는가, 왜 저렇게 자유롭게 놀지 못하는지, 문화적인 충격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도 뚜렷이 기억에 남았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 광고가 있었는데, 차 광고도 있었고 에어컨, 핸드폰, 샴푸 광고가 있었다. 북한에서 핸드폰을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광고 영향이 조금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재미있게 본 뒤 어떻게 들켰는지, 우리는 10월 초에 구류장에 들어갔다. 4명이 걸렸는데, 이상한 벌판 같은 곳으로 끌고 가더니 천막을 대충 쳐 놓은 곳에 가두는 것이었다. 거기서 한 보름 정도를 앉아있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다시 보안원들이 다시 왔다. 왜 그랬냐고 묻길래, 그저 호기심에 그랬다고만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갇혀있는지 죄목도 전혀 몰랐지만, 그냥 무조건 둘러대야만 했다. 어려서 그랬는지, 보안원들은 빗자루 같은 걸로 몇 대 때리고 나서 우리를 풀어줬다.

학교로 돌아가니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어디를 갔다 왔는지 말은 안 했지만, 대부분이 알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마침 성적도 떨어졌던 난,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다.

퇴학 후, 한국으로 오기까지

퇴학 당하고 나니 길이 막막했다. 난 그 이후로, 평양 친척집에 가서 1년을 지냈다.

평양에서는 장사를 했다. 어머니께서 중국을 통해 의류를 들여오시면, 그 의류를 소포를 통해서 받아 평양에서 팔았다. 난 그 돈으로 다시 쌀을 샀고, 쌀을 다시 무산으로 보내 이득을 챙겼다. 평양에 비해서 함북지방은 쌀 값이 비쌌기 때문에 꽤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물론 기차를 통해 소포가 제대로 갈 리가 없었다. 소포를 보낼 때마다 운반하는 애들한테 돈을 줬고, 우리 집에서도 꽤 여러 번 재워주기도 했다.

그렇게 수완 좋게 장사를 했지만, 그것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친척집에 얹혀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고, 결국 난 무산 고향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살다 무산에 가니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었다. 무산에서 부유층 아이들과 만나 어울리던 어느 날, 나는 그 아이들이 중국에 왕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더 나은 생활을 찾아서 2001년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국경을 넘은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20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중간에 한 번 북송되기도 하고, 탈출하기도 하고. 두만강을 건너기도 하고. 파란만장한 날들이었다.

내가 국경을 넘었던 건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고, 어떤 위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막막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북한에 있기가 답답했고, 좀더 풍족한 삶이 그리워서였다. 환상을 쫓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남한에서 나는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원래 이과 계열이었으니, 공대를 지망하고 재수 학원을 다니고 있다. 현재의 목표는 포항공대다.

하지만 퇴학 당한 이후 5년 동안 평양과 중국, 한국을 거치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에 쉽지 않다는 걸 실감한다. 수능 문제도 만만치 않다. 너무나 오래 쉬었던 탓인지, 탈북하면서 잃어버린 세월들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공부 이외에 농사, 막노동, 꽃게 잡이, 아르바이트 등 안 해 본 게 없다. 수많은 고생을 이겨낸 내 경험으로 난 어떻게든 삶에 대한 자신감을 이어 왔다. 실패해도 일어날 자신이 있다.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공부다. 북한과 너무 다른 공부 체계를 나는 접해야만 한다.그러나 열심히 하면 잘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때까지 난 다시 공부할 뿐이다.

박영남(가명, 2004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