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분조’ 세대의 불행했던 처녀들

▲ 청년들의 노력동원을 촉구하는 북한의 선전물

평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지 한해 만에 모교에 들려야 할 일이 있었다. <8. 18 판문점 도끼 사건>으로 졸업을 불과 며칠 앞둔 채 붉은청년근위대에 강제 징집 당했던 나와 동기 졸업생들이 1년간의 근위대 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북한전역에 고취된 전쟁열기 때문에 중앙대학들이 아예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고 사범대 입학의 기회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들을 노동판에 막 배치하기에도 어쩡쩡 했던 시절이었다.

꿈 많던 중학 졸업시절, 사람잡던 ‘청년분조’

우리가 학교당국의 지시를 기다리며 학교 구내를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 한쪽 마당에서 이제 졸업하는 학생들이 학급별로 열을 지어 앉았는데 낯익은 여학생 둘이 대열 앞에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분명히 비판받는 자세였는데, 앉아 있는 학생들은 그 두 학생의 태도에 오히려 동조한다는 듯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사연을 알아본즉 전국적으로 불어대는 청년분조 바람에 그 해에 졸업하는 학생들마다 남자학급은 군대에, 여자학급은 농촌에 집단 자원하라는 국가적 강요에 몰렸는데 대열 앞에 나와 선 여학생 둘이 감히 그 강요를 거부하고 있어 조직적인 비판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국가의 강요에 맞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사무치게 깨닫고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지원서’에 서명 했다고 했다. 그런데 두 처녀는 자기의 꿈을 지키겠다면서 무시무시한 저항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이 “오히려 선배님들은 운이 참 좋았다”는 것이다. 후배들은 “우리들은 평생 농촌 귀신이 되게 생겼다”며 다들 울상을 하고 난리였다.

붉은청년근위대 출신들은 또 다시 중노동 현장으로 ‘징집’

하지만 후배들이 ‘평양에 남는다’며 부러워하던 우리 학년 여자 졸업생들은 ‘붉은청년근위대’에서 1년 동안이나 맨손으로 병실(病室)을 짓고,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14. 5mm 고사기관총을 다루던 ‘경력’ 때문에 구역행정위원회가 노동현장에 집단 배치하는 ‘2차 징집’에 걸려들었다. 입직(入職)의 선택과 퇴직(退職)의 자유가 일체 허용되지 않는 평양시내 말단직종으로 강제 배치된 것이었다.

기름에 절은 시커먼 노동복을 입고 기름때 묻은 손을 제대로 씻을 틈 없이 기계의 온갖 소음에 매일같이 시달리며 우리는 쇠붙이를 깎고, 찍고, 붙이는 일을 해야 했다. 빽을 동원해서 좋은 직장으로 옮기려 해도 ‘노동과’에서 허락해주지 않았다.

수년간 공장의 ‘노동과’와 투쟁하여 드디어 퇴직의 영광을 두 손에 쥐었을 때는 자신의 꿈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국가적 배치의 그물에 걸려 마음과 정신이 깨끗이 거덜 난 상태였기 때문에, 설사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또 쇠붙이 만지는 일이나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평생 농촌지역에 묶여 사는 ‘청년분조’ 지원자들

그나마 직업을 바꿀 수 있는 우리는 좀 괜찮았다. 부족한 농촌인력을 손쉽게 채우려는 국가정책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졸업생 처녀들은 ‘청년분조에 스스로 지원했다’는 현란한 미명 하에 대를 두고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남자 졸업생들의 경우 대부분 인민군대에 지원하였는데, 북한 사회가 군대를 비천하게 보는 풍토가 아니어서 심리적 고통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군대를 마치고 입당도 하고, 대학도 가겠다고 의기가 양양했다.

그러나 여자 졸업생들이 강요당하는 직업들은 대부분 ‘수용소’처럼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하는 직종이었다.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의 직업들이 수두룩 했다.

물론 청년분조를 당당히 받아들인 처녀들도 있었다. 어짜피 자기집이 농장이고 가문도 농장원 출신이어서 이러나 저러나 죄인 같은 삶을 살 바에는 국가적 캠페인을 이용하여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계산이 분명한 졸업생들이었다.

당 선전용으로 이용되는 사람들의 불쌍한 신세

1980년대 중반, 평남도 평원군에 모내기 지원에 나갔다가 그런 경우의 청년분조 성원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농장에선 그녀들을 위해 ‘청년분조 합숙소’를 따로 지어주었다.

국가는 이들에게 TV와 악기 몇 개를 내려 보내줬다. 내가 그들과 일 하면서 살펴보니 그들은 농장 일보다는 국가적 행사나 신문, 방송의 인터뷰에 더 매료되어 있었다.

국가나 당 조직에서 그들을 부추겨 주는 모임이나 행사가 없으면 그들은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불안해 했다. 항상 먼 산을 바라보고 매일매일 또 다른 색깔의 국가적 관심과 당적 표창을 기대했다.

농장일꾼들은 그들을 ‘망나니’라고 불렀다. 일에는 생각이 없는데다 당 조직에서 부추겨 주는 행사에만 눈이 높아져 관리위원장이나 작업반장 같은 농장 어른들은 우습게 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에 대한 농장원들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장원들은 그들을 같은 농장원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붕 떠서 날아갈 철새 정도로 여겼다. 농장에서 10년째 일하는데 어느것 하나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다고 했다.

같은 해에 중학교를 졸업하여 농사 분조에 배치 받은 처녀들은 그 사이에 진짜 농사꾼이 다 되었다고 하였다. 청년분조원들 자신도 이 말을 수긍하였다.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앗아가는 ‘청년분조’

집단지원의 명목 하에 전국의 농촌들에 무수히 조직된 ‘청년분조’는 국가가 청년들의 노동력을 손쉽게 착취하기 위한 선전도구였다. 북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는 어린 처녀들은 자신이 대학입학의 희망을 지녔든, 발레리나의 꿈을 꾸어왔든 상관없이 ‘농부 인생’을 강요당하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직도 북한의 처녀들은 ‘청년분조’라는 애꿎은 캠페인의 제물로 인생이 뒤틀리고 있다.

*주)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

최진이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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