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결소 간부, 강간해놓고 임신하자 마취 없이 낙태시켜”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증언해주실 분은 2007년에 강제북송돼서 북한 구류장과 집결소에서 인권 침해를 당했던 김찬미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 고향은 어디십니까? 한국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고향은 함경북도 샛별입니다. 2012년 6월에 입국했습니다.

– 가족들과 함께 오셨나요?

제가 5녀 1남 중 넷째 딸인데, 부모 형제가 거의 다 사망하고 위로 언니 한 명, 아래로 남동생 한 명 있습니다. 아직 북한에서 살고 있어요. 한국에는 홀로 넘어왔습니다.

– 오늘은 집결소에서 겪었던 인권 침해를 증언해주시러 왔는데요. 일단 구류장에는 왜 들어가게 됐나요?

사실 긴 시간 구류장에서 겪었던 일을 오늘 단시간 내에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구류장을 생각만 해도 머리끝이 다 쭈뼛거려요. 그곳에선 사람을 움직일 수도 없게 무릎을 꿇려놓아요. 움직이면 체벌을 가하는데, 쇠갈고리로 손을 내려치는 등 매를 맞습니다. 담당 1심원이 저희를 찾아와 취침 시간이라고 알리는데, 그 전까지는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어요.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일 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나마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어요. 하루에 2, 3번 정도만 갈 수 있었습니다.

– 그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나요?

체벌이 가해지죠. 손바닥을 60cm 정도 되는 쇠갈고리로 50번씩 내리치고는 했는데요. 그러면 손바닥이 다 터지고 피투성이가 돼요. 이건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거예요. 원래는 손등을 때렸는데 그러면 뼈가 부러지는 경우가 많아서 손바닥을 때리기로 한 겁니다.

– 구류장에 들어간 건 결국 한국으로 오려다가 잡혀서 북송됐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어쩌다 잡히셨나요?

처음엔 먹을 게 너무 없어서 돈 벌려고 중국에 나갔던 거예요. 그러다가 팔려갔습니다. 중국에선 도저히 마음 편히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결국 한국행을 결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변방대에 붙잡혀서 구류장으로 이송됐습니다. 2007년 7월에 잡혔어요.

붙잡힌 건, 우리 일행 중에 간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몽골 국경을 넘고 있었는데, 일행 7명 중에 간첩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중국 구류소에 먼저 끌려갔는데, 취조 과정에서 저를 너무 심하게 대하더군요. 가죽 벨트로 때리는데 눈이 다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정말 심하게 맞았어요. 전기 방망이로도 맞았습니다. 전기 고문인 셈이죠. (중국) 뉴스나 드라마에서나 봤던 전기고문을 제가 실제로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중국 구류장에서 3개월을 보내는 동안엔 정말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느꼈죠, 다시는 잡히지 말아야겠다고요. 서러움도 컸습니다. 북한이 잘 살았으면 우리가 이렇게 허둥지둥 도망치며 살 필요는 없었을 것 아녜요. 고향이 없는 서러움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나서 자란 곳은 북한이 맞지만, 그 고향을 등지게 됐다는 게 정말 서러웠습니다.

– 구류장으로 이송된 후의 생활도 궁금합니다. 식사 배급은 어떤 수준이었나요?

밥은 많아야 세 숟가락이 됐을까요? (숟가락에 밥을) 꽁꽁 다져야 세 숟가락 나올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그 세 숟가락이 온전한 밥도 아니에요. 개나 돼지도 못 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주로 옥수수 불린 게 나왔는데, 옥수수 알만 있는 게 아니라 껍질까지 같이 나왔더라고요. 거기에 두부콩이 몇 알 들어있는 게 전부였죠. 배추 시래기국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소금이 들어가 있는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 목욕은 할 수 있었나요?

구류소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면 열흘에 한 번 찬물에나마 씻을 수 있었습니다.

– 그럼 구류장에는 얼마나 있었나요?

3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 구류장에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린 건가요?

네, 저는 233조 전단을 받았습니다. 이건 비법 월경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판결인데요. 후단은 무기형으로 갑니다. 저는 전단을 받아 교화 3년이라는 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교화소로 이송됐어요. 한국으로 말하면 교도소입니다.

– 구류장에서도 굉장히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집결소에서는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우선 온성 보위부에서 23일 정도 고문을 받았습니다. (몽골 국경서 붙잡힐 때) 이미 한국행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23일 취조 기간 내내 고문을 받아야 했어요. 조사를 받으러 갈 때는 걸어갔지만, 조사를 받고 돌아올 때는 제 발로 못 돌아왔습니다. 피투성이가 돼서 왔어요. 제 입에서 빨리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야 하니까 23일 내내 모진 고문을 가한 겁니다. 

23일이 지난 후에는 다시 저를 담당하기로 한 구역에서 데리러 나왔어요. 샛별 보위부로 이송됐는데, 거기선 15일 있었습니다. 이후엔 제가 (배가 고파 탈북했던) 경제범이라는 게 밝혀져 대기소로 이송됐습니다. 대기소는 집결소와 비슷한 곳인데, 거기서는 한 40일 정도 있었네요.

–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보위부 조사에 앞서서는 먼저 진술서를 써야 했는데요. 보위지도원들이 이 진술서를 보고 스스로 납득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는 거짓말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서 그렇게 계속 썼는데, 보위지도원들이 도무지 제 진술을 납득하지 못하는 거예요. 진술서를 쓰는 내내 나무 각목이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조사 과정 내내 그것으로 맞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게 그 때 맞은 흉터가 있어요. 팔꿈치도 뼈가 나갔고요, 등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못이 튀어나온 나무 의자로 내리치면서 제 등에 못이 박힌 거예요. 맞을 때는 몰랐는데, 조사를 받고 나와 보니 몸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 때서야 등에 못이 박혔었고 팔꿈치 뼈가 나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여전히 제 몸에 흉터가 남아있어서 그 때의 일은 잊을 수가 없네요.

– 대기소에서는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저는 보안서 감찰과가 담당하는 구역에 있었는데요. 감찰과 부과장이 저희를 맡고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집 건설도 했고, 역전에서 식량을 차에 올리고 내리는 일도 했어요. 그런데 (이 구역을 맡고 있던) 감찰과 부과장이 여자들을 모두 성추행한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게 그저 돌아가는 소문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한 사람이 겪은 일이 말이 불어나 여기저기 알려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저도 그런 일을 겪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감찰과 과장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을 내보내더니 제게는 밥을 만들라고 시키더라고요.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은 것이죠. 저는 그저 ‘내가 오늘의 식사 당번이구나’ 하는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사라지자) 저를 다른 방에 가둬놓더군요. 그 후로는… 여자가 남자를 힘으로 이기려 해도 쉽지 않아요. 저도 어떻게 해서든 버티려 했지만 도저히 부과장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죠. 결국 그 자리에서 강간을 당했습니다.

– 조심스러운 질문이기도 한데요, 그런 식의 성폭행은 다른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도 자행되는 것이었나요?

그렇죠. 저는 구류장이라고 하면 우리가 죄인 취급을 받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담당 부과장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많은 치유를 받았으니 그나마 이렇게 북한의 실상을 라디오로 북한에 알리고 있는 거예요. 북한 사람들은 구류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저 역시 북한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하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히 제가 대한민국에 와서 할 말 다 하며 북한에 알릴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제게도 분명 상처이지만, 북한 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해서 알리려는 겁니다. 인권 유린을 당했던 사람이 직접 이야기하면 북한 사람들에게 훨씬 그 실상을 잘 알릴 수 있어요. 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북한 사람들이 한국은 물론 북한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 교화소에 가기 전 집결소에서도 구타나 성폭행 등의 인권 유린이 자행됐나요 ?

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그렇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제가 교화소에 가서 보니까, 대기소에서 제게 성폭행을 가했던 같은 사람에게 일을 당해 임신한 채로 이송된 여성도 있었어요. 그 여성은 본인이 임신한 것도 모른 채로 교화소에 왔다가, 사실이 드러나 샛별 보안소로 이송돼 강제 낙태를 당했습니다. 이게 한두 건에 지나는 게 아니에요. 많은 여성들이 일반적인 고문은 물론 성폭행까지 당해서 큰 상처를 받고요. 이를 치유 받지도 못한 채로 교화소에 구금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 성폭행에 의해 임신할 경우 강제 낙태를 시키는 군요. 김찬미 선생님도 그런 일을 겪으신 건가요?

네, 저는 집결소(대기소)에서 40일 정도 있었는데, 그 기간 중 입덧이 시작됐어요. (저를 성폭행 한) 감찰과 부과장이 제가 입덧으로 인해 토하는 모습을 보더니 저를 바로 산부인과로 데려가더군요. 마취도 없이 저를 수술대에 올려놓고는 강제 낙태를 시켰어요. 이후 바로 구류장으로 보냈습니다. 본인이 저를 더 데리고 있어봤자 액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는 채로 구류장에 갔습니다. 치료라는 것도 없었어요. 제가 수술하는 모습을 그 부과장이 모두 봤는데, (아이를 뗀 걸 보고는)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 대기소에서도 성폭행이 빈번히 일어나는군요.

네, 그나마 중국에서는 수감자와 교관들 사이에 그런 건 없었어요. 죄수들은 다 족쇄를 차고 움직여야 했거든요. 하지만 북한 대기소는 족쇄 없이 지시 받은 대로 일하러 다녀야 했으니, 간수들도 죄수들을 막 대했습니다. 죄인 취급을 한 걸 넘어서서 아예 자기네 개처럼, 노리개처럼 여겼어요. 여자로 생각해서 성폭행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성적으로) 원할 때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몸종이나 개로 생각한 겁니다.

– 그런 식의 성폭행은 주로 간수들이 했나요?

그렇죠. 저의 경우 대기소 감찰과 부과장에게 당했고요. 부과장이 자신의 직업을 앞세워 협박한 뒤 여자들을 성폭행 하는 겁니다.

– 혹시 그 감찰과 가해자가 나중에 성폭행 혐의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나요?

처벌 같은 건 없었습니다. 제가 교화소 3년 생활을 마치고 다시 보안소에 갔었는데, 그 때도 그 직급으로 있더라고요.

– 여자로서 이런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당당히 하기로 용기 낸 이유는 뭔가요?

만약 저 한 사람만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다면, 제가 죽으면서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이런 일은 여전히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나마 이렇게 당당히 말해서, 북한 주민들에게 ‘여러분이 살고 있는 북한은 이런 곳’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를 성폭행한 감찰과 부과장뿐만 아니라 직급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반 주민들을 무시하고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지만, 그걸 피해자 가족조차 모릅니다. 제 가족들도 제가 이런 고통을 당했다는 걸 몰라요. 그러니 여기에 와서라도 당당히 사실을 알리려는 겁니다. 그저 빨리 통일이 돼 북한에서 고통이 사라지기를, 북한 주민들도 모두 평범한 삶을 누리며 살길 바랄 뿐입니다.

성폭행과 강제 낙태는 여성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는 반인도범죄입니다. 국제사회는 이런 반인도범죄를 기록하고 있고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날이 올 것입니다. 구류장과 집결소에 있는 북한 당국자들은 지금이라도 수감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즉각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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