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데일리NK·국민통일방송이 이산가족 안윤준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상=유튜브
제 20차 이산가족 상봉 1차 상봉이 완료됐고 남측 가족 90여명이 24일부터 북측 상봉 대상자 255명과 상봉합니다. 이번 1차 상봉에서 65년 만에 만나는 노부부와 뱃속에 있을 때 헤어져 생전 처음 아버지를 만나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 통에 가족과 제대로 된 작별의 정을 나누지 못한 이들도 있는데요. 이런 사연을 가지고 60여 년 만에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는 상봉 대상자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20일 이산가족 상봉 2회차 대상자로 선정되신 안윤준 할아버지(아래 사진)와 정차순 할머니를 만나봤습니다.
1. 먼저, 축하드립니다. 이산가족 상봉 최종 대상자로 선정되셨는데요, 이제 며칠 후면, 60여 년 동안 헤어져 살아온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어떤 심정이신가요?
기분이 좋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번에 소식 듣고 선발되어서 참 기쁩니다.
2. 두 분이 모두 이산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연으로 가족들과 헤어지시게 된 건가요?
부모가 일제 시대에 지주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성분이 나빠서 도저히 북한 사회에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또 지주 생활로 인해 가지고 있던 토지 전부를 소작농에게 분배해주고 지주인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토지를 분배해주는 것, 그것까지는 다 좋은데 이렇게 되면은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있느냐, 그런 이유로 혼자 생각한 것이 인민군에도 가야하는데 인민군에는 절대 갈 수 없고 혼자 탈출해서 혼자라도 살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을 만나지를 않고 혼자 야반 도주 해서 이렇게 왔어요. 와서 그 당시 월남했을 때가 전쟁이 일어나서 북진할 때 였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 11월 달에 한국군 국방대에 지원했어요. 제가 그 당시에 소속된 부대가 육군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던 1사단이었어요. 그 1사단이 서부 전선만 담당해서 전쟁에서 북진할 때도 서부 전선을 담당했는데, 그래서 그것을 55년 제대하는 날까지 1사단에서 근무를 했어요.
3. 야반도주를 하시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거면 지금까지 마음이 불편했을 것 같은데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나와서 제일 불편한 게 뭐냐면 명절 때 우리 식구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도 할 수 없고 그리고 그 동안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말 결혼하기 전 까지 나 혼자서 그것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정말 명절 때가 제일 가슴 아프고 가장 많이 생각이 납니다.
마침 통지가 왔는데 큰 동생하고 그 밑의 동생하고 살아있고 하나는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1983년 2월 18일 날인가 세상을 떠났어요. 떠난 사연도 모르고 그 것을 통지 때문에 알았는데 이번에 만나면 그걸 좀 물어봐야죠.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나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을 물어 자극적인 얘기가 된다면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안내문에 그렇게 통지가 되어 있고 절대 그런 얘기하면 안 된다고.. 그냥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사망시와 안장된 장소만 물어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슬픈다는 겁니다.
4.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북에 여동생 세 명이랑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가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여동생 두 명만 남았습니다.
5. 북쪽에서는 누가 나온다고 하셨습니까?
세 사람이에요. 북쪽에서 나오는 가족은 내 동생, 여동생 둘이가 나와요. 그런데 통지서를 보니깐 걔네들도 나이가 82살이 되었어요.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벌써 나이가 그렇게 많이 들었더라고요. 사실 걔들이 중학교 들어갈 때부터 학교 기숙사에서 공부하고 나하고 만난 역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70년 만에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는 게 진짜 꿈인지 생시인지…,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하지 말라는 말이 많아서 그것도 문제이고…
6. 궁금한 것도 많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도 많으실 텐데, 여동생을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하시고 싶으세요?
꼭 전하고 싶은 것은 먼저 동생들한테 사죄하는 것입니다.
6-1. 어떤 부분에 대한 사죄인가요?
내가 있었으면 가장으로서 책임을 졌을텐데, 없었기 때문에 여동생들이 처음부터 책임을 지고 일을 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 돌아가고 그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여자 둘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받고 그 다음에 다른 얘기를 해야지요. 그리고 우리 동생이 예능 쪽에 소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지금 물어보고 싶어요.
6-2. 동생과 관련한 기억이 생생하신가요?
물론 얼굴도 기억이 나는데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이 여기(이마)에 흉터가 나있어요. 그게 왜 흉터가 생겼냐면 나하고 장난치다가 장롱에 부딪혀서 상처가 났어요. 만나면 그것부터 볼것입니다. 너 상처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것 보면 틀림이 없겠죠. 둘째는 잘 모르겠고 둘째는 어떤지 다시 물어봐야 하고. 여동생들 모두 만일 어머니를 닮았으면 뚱뚱할 거고 아버지를 닮았으면 좀 보통 사람 같고 그럴 겁니다.
7. 할아버지가 이산가족이라는 것은 남한에 계신 가족 분들도 다 아실 것 같은데요. 뭐 할머니라든가 아니면 할아버님 자제분이 아시면 혹시 어떻게 이야기를 하던가요?
내가 이산가족이라는 것은 잘 알죠. 왜 명절 때 보면 알잖아요. 다른 집에는 할아버지건 손자건 많은데 우리 집에는 고모도 없고 아무도 없으니깐 다 알지요. 그리고 내가 이북에서 태어난 것 다 알고 내가 또 설명을 해 주었고…
8. 혹시, 만나는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으신가요? 오전에는 장을 보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무엇을 사오셨나요?
적십자 안내문을 보면 선물은 생활용품, 의약품 그정도만 준비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준비를 했는데 딴 사람들이 고국으로 가면 뺏는다고 그래서 좋은 것은 못했어요. 일반 사람들이 착용하고 사용하는 물건들 준비했어요, 두 보따리 나누어서 주려고 합니다.
8-1. 옷가지나 이런 것을 준비 하셨네요?
옷이랑 의약품. 상비약으로서는 감기약, 설사약, 소화제, 영양제, 파스 이정도로 다 준비했지요.
9. 그런데, 참 모순적인 상봉이기도 한데, 다시 못 만나는 기약 없는 이별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아픈 행사가 아닐까 싶은데요. 헤어질 때는 또 어떠실까요?
기약 없는 이별을 말하기 전에 정부가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진짜로 머리를 쓰고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후속 조치로서 서신 연락이라든가 상호간에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면 안심하지요. 그동안 ‘재미있었니’라고 물을 수도 있고. 그런 조치 좀 해주었으면 좋겠고요. 또 하나는 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힘들다면 여기서도 도와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서 생활비로서 돈을 얼마정도 붙여줄 수 있게끔 서로가 상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면 참 아주 좋겠어요.
10. 말씀 나누면서 저도 가슴이 너무 아픈데요. 이산가족의 한 분으로서 소원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 있으신가요?
내가 소원하는 것? 첫째는 통일하는 것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저 백성들(북한 주민들)을 많이 좀 도와주고 후원해주는 게 또 하나의 소원입니다. 그것이 내 동생도 살고 다 살고 북에 있는 이천 만명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방법 같아요.
11. 여동생분 만나시면 눈물도 많이 흘리실 것 같은데, 어떠실 것 같나요?
나는 울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통곡하고 싶지요. 그 아이들이 나 때문에 고생한 것 생각하면 참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죄인이지, 죄인. 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지요. 난 테이블에 앉기 전에 무릎 꿇고 사죄를 할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경우라서 환경도 그렇고… 그런 것을 사죄해 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이야기를 할겁니다.
여동생 잘 만나시고, 이산가족 행사가 잘 마무리 된 후에 못 다한 이야기 다시 한 번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