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게임’ 또는 ‘거짓말 게임’…김정일의 자복서

▲ 북한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힐(오른쪽) 미 국무부 차관보가 4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박의춘 외무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연합

1. 지나간 진실게임

온 나라가 BBK주가조작 사건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관련여부로 뒤숭숭하다. 지난 5일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후보는 모든 혐의, 즉 주가조작과 횡령, DAS와 BBK의 실소유 여부에서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일단 이 사건의 핵심이 주가조작과 횡령이며, 이 점에서 이명박후보가 관련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발견되지 못하였다면 응당 무혐의 처리를 받는 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또한 김경준씨가 제시한 문건이 위조임이 밝혀져 그의 주장의 신빙성이 땅에 떨어진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BBK의 실소유 여부만을 판단한 검찰은 ‘소유’와 ‘관련여부’가 동일한 개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나 ‘소유’와 ‘관련여부’가 반드시 동일한 개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른바 이후보의 BBK 명함 및 당시 인터뷰 등에 대한 수사를 배제하여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이 점에 대하여 국민들이 검찰수사결과에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검찰수사결과와 명함 및 인터뷰 등이 사실이라면 이후보가 BBK의 운영에 관여하였지만 김경준씨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 결론일 것이다. 이 점이 이후보에게 얼마만큼 불리하게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감추어야만 할 그만의 수치는 아니다. 김경준씨의 위조 계약서를 진짜로 믿고 사기당한 것은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아직 우리의 문화에 깨끗한 논쟁이 자리잡지 못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는 풍조의 방증이긴 한다. 이후보측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지만 그에게 씌워진 BBK연루 의혹의 핵심은 벗겨졌다고 보는 것이 현 시점에서 타당할 것이다.

2. 다가오는 진실게임

그런데, 이제 한반도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진정한 ‘진실게임’이 다가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김정일이 이제 3주쯤 남은 올해 말까지 제출해야 할 자복서(自服書), 즉 북한이 작성·공개해야 할 핵프로그램 리스트의 진실성 여부이다.

쟁점은 세 가지로 (1) 지금까지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 (2)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3) 북한-시리아간의 핵기술 내지 핵물질 이전 의혹에 대한 것이다. 어느 하나 북한이 쉽게 ‘자복’하기 어려운 분야다.

우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의 양을 정확히 신고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난 50년간 북한이 집요하게 핵무기 개발을 시도해 왔다는 점에서, 또 적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바로 ‘진실’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상식적 정의라는 점에서 기대난망이다.

결국 북한에서 지금까지 추출됐다고 짐작되는 플루토늄의 양을 놓고 북한과 미국이 서로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일단 유리한 측은 북한이라고 보이며, 지금 현재 진행 중인 핵불능화가 재가동에 1년 정도 걸리는 ‘사실상의 임시 가동중단’이라는 점에서 김정일정권이 “피땀 흘려” 확보한 핵물질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농축우라늄(HEU)에서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핵프로그램의 신고여부도 김정권이 쉽게 자복할지는 의문이다. 2002년 2차 북한 핵위기의 도발선이 된 고농축우라늄 문제가 흐지부지 된다면 미국 측으로서는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다. 이후 5년간 북한은 플루토늄을 계속 추출하고 핵실험을 하여 사실상 핵보유국의 위치에 오르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북한은 처음부터 고농축이든, 그냥 농축이든 우라늄프로그램이 없다고 발을 빼왔다. 파키스탄 대통령 무샤라프의 자서전이나 칸박사의 증언을 부정하고 북한에 반입된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사용처를 둘러대고 있다. 논리적으로 보아 어느 한 쪽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야 하겠지만, 미국과 북한이 적당히 봉합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연구용으로 들여왔다’는 둥의 면피성 해명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9월 6일 이스라엘이 폭격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한 건물이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모형으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서방언론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이 폭격의 내막에 대하여 브리핑을 받은 사람들의 진술들은 시리아와 북한 간에 핵 협조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핵과학자에 의해 폭격당한 건물은 원자로가 아니라, 북한이 제공한 핵물질로 핵무기를 조립하는 공장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2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빅터 차의 컬럼에는 북한이 비공식적으로라도 시리아와의 핵협조관계를 시인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실렸다. 이미 사실로 간주되고 있는 북한-시리아 핵관계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핵확산금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밝혀져야 하지만, 김정일정권의 입장에서는 인정할 경우 신뢰도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북한판 진실게임, 상식적으로 말해 ‘거짓말 게임’에서 북한이 우선 미국의 약점을 고려할 것이다. 부시정부는 외교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 북한 핵해결이 간절히 필요할 뿐더러, 또 최악의 경우, 북한의 신고 핵목록이 너무 거짓말이 심해 주변국이 도저히 인정하지 할 수 없어서 6자회담이 실패할 경우에도 ‘현상태에서는’ 미국 등 5개국이 특별한 해결방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북 경제봉쇄가 이루어지더라도 ‘현상태로라면’ 김정일 정권은 한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선에 눈과 귀가 쏠리는 틈을 타서 노무현정권은 북한에 대한 각종 지원을 마치 “땡처리”라도 하듯 서두르고 있다.

결국 노정권은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남북 간의 평화를 위한 경제협력’이라는 미명 하에 북한핵을 폐기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를 없애고 있다. 그것은 북한이 ‘핵을 국제사회가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폐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절박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핵을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수준만 폐기해도 생존할 수 있다’는 여유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10여일 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만일 남북 간의 경제협력, 평화공존이라는,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내세워 지금과 같은 ‘퍼주기’ 햇볕정책을 계속하려는 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매우 어려운 미래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폐기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 ‘퍼주기’ 정책을 중단할 경우 북한의 반발은 매우 거셀 것이다. 왜냐하면 전임 대통령이 도장 찍은 ‘어음’을 내밀며 빚 아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쉽지 않은 미래를 예상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전자의 경우에는 미래가 어려울 뿐더러 희망도 없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핵은 ‘절망을 담보로 하는 협박’을 의미하며 결코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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