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기자들의 사면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진전에 열의를 내고 있다. 여기자 사면을 고비로 ‘도발-제재모드’를 미국과의 양자대화를 통해 ‘대화-협상모드’로 바꾸려는 것이다.
북한이 정국 전환을 꾀하고 있는 사실은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결과 설명과 이후 이어지는 북한 관리들의 발언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김영일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10일 올란바토르에서 몽골의 고위 외교당국자들과 만나 6자회담 불참 의사를 거듭 밝히면서 “조건이 충족된다면 미국과의 대화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며 조만간 미·북관계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반면 미국은 대북제재 지속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미국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결과 디브리핑(debriefing)을 통해 북한의 태도를 ‘의미있는 변화가 없다’고 결론짓고, 12일 북한의 조선광선은행(KKBC)을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확산활동과 관련한 금융제재 대상기업으로 추가 지정했다.
필립 골드버그 미 대북제재 조정관이 이끄는 제재 전담반은 ‘클린턴 효과’에 쐐기를 박듯이 다음주 한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등 아시아 4개국을 방문, 대북제재 공조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북한의 선차적인 행동변화 없이는 제재 국면을 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미국은 6자회담 안에서 북한과의 양자회담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한이 중단한 핵불능화 조치를 이행하고, 6자회담 또는 다자회담을 약속하면서 선(先) 미-북 양자대화를 요구하면 미국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실제 2차 북핵위기 당시 양자냐 다자냐는 회담 형식을 놓고 미북간 지지부진한 논란이 지속됐을 때도 중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이 한차례 진행된 후 6자회담으로 이어 갔던 적이 있었다.
이는 형태야 어쨌든 엄연히 북한의 1차적 굴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북한 외무성의 노정수 일본담당 연구원은 12일 교도통신과 평양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은 6자회담으로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는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외교가에서 최근 미·북 관계를 ‘어려운 첫 발걸음이 시작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도 쉽사리 타협점을 찾기 어려운 현실조건을 반영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이 핵폐기를 위한 6자회담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용론’을 설파해왔다. 회담 불참을 선언한 것도 결국 핵보유국 지위를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군축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정지작업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부에서 제기하는 통미봉남이나 미북간 유화국면 전망 등은 섣부른 판단으로 보인다.
북한은 현재의 제재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양자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시간벌기를 통한 핵보유국 실체 인정을 위해 핵 불능화를 내걸고 변형된 양자협상을 촉구할 수도 있다.
미국이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전술은 통할 수 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이제 출범한 신생정권인데다 핵 비확산을 강조하고 있어 북한의 이러한 대화 공세가 성공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겉으로는 제재국면이 계속되고 물 밑으로 대화 조건을 타진하는 지루한 공방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북핵문제와 관련해 핵폐기에서 핵확산 방지로 방향을 선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이란이나 다른 국가에 적용할 수 있지만 북한 정권에 적용은 어려워 보인다. 이미 북한 정권은 핵 폐기 이외에 대안을 제안할 수 있는 신뢰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북핵 문제와 관련 양국간 힘겨루기는 이제 대화의 장보다는 제재와 체제 보위의 기세 싸움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