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진작가의 대담한 밀착 방북기 ④

▲ 북한방문기가 게재된 中 사이트

이번 북한방문에서 우리가 참관한 중요한 행사가 김일성 동상에 꽃다발을 바치러 간 것이다. 다른 여행객들도 그렇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꽃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지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내원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나 꽃다발은 우리가 직접 사야 했다. 한다발에 중국 인민폐 30원(한화 약 4천 5백원-편집자)이다. 우리 일행은 돈을 모아 한 묶음을 샀다.

▲ 만수대 김일성 동상

단둥(丹東) 역전에서 보았던 꽃바구니도 여기에 바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꽃을 사서 안내를 따라 광장으로 갔다.

▲ 여기서도 절을 세번 해야 한다

안내원은 참배하러 가기 전에 지켜야 할 규율에 대해 말했다. 동상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며, 수령을 흉내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광장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이미 많은 꽃들이 바쳐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꽃바구니는 동상 앞에, 꽃다발은 발 아래에 있는 단상에 증정되었다.

▲ 당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 군중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인민의 ‘위대한 수령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은 5.1광장(김일성 광장)에서 열병사열을 받고 있었다. 그는 ‘무적의 인민군’을 사열하고 있었다. 중국정부에서 파견된 우의(吴仪)부총리도 열병식에 참가했다. 그날 우이는 붉은 통치마를 입고 참가했다. 열병식에서 전투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 횃불행진에 참가할 시위대가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

동상언덕을 내려올 때 수많은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그들은 이미 땡볕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밤에 진행하게 될 횃불행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런 행사는 중국에서 엄두도 못낼 일이다. 수많은 횃불 대오들이 각종 도안과 피켓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의 규율 상태로 보면 화상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면, 화재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 만경대 김일성 생가

▲ 만경대 김일성 생가 해설원

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 생가는 원래 돈 많은 사람의 묘지를 봐주는 사당 집이라고 한다.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부자의 묘를 봐주기로 하고 이 집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 김일성의 고향집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김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기가 본래 사당집이 맞는가? 그럼 그 부자의 묘지는 어디에 있는가” 물었다. 김 가이드는 말을 아꼈고, 우리측 가이드가 “모두 옮겨졌다”며 대신 말했다. 나의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 ‘광복의 천리길’에 나섰다고 선전하는 14살의 김일성

이 그림은 만경대입구의 도로변에 있는 그림이다. 그림은 소년시절의 김일성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혁명의 길’에 나서는 그림이다.

▲ 김일성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 김일성 일가

▲ 노병들도 만경대를 찾았다

생가 방문을 마친 후 우리는 만경대(만경봉으로 추측- 편집자주)에 올랐다. 나는 만경대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렸다. 만경봉의 풍경에 정신 팔려 잊어버렸다. 만경봉은 경치가 아주 좋았다.

▲ 평양 지하철, 깊이가 120m가 된다

그날 마지막 관광으로 우리는 평양지하철을 참관했다. 평양지하철은 68년에 건설되기 시작해 87년에 개통되었다. 전체노선구간은 35km라고 한다. 제일 깊은 곳이 120m,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참관한 곳은 깊이110m, 밖으로 나오는 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분 이상 걸린다.

▲ 지하 전동차 내부, 촬영기사는 항상 우리를 촬영했다

▲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은 어디에나 걸려 있었다

내려가서 끓어 앉아 위를 올려다 보면 바깥이 안 보인다. 듣자니 평양시 지하를 뚫어 ‘요새화’ 했다는 것이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전 시민이 전부 지하로 대피한다고 한다. 원자폭탄도 뚫지 못하게 구축했다고 한다.

▲ 평양의 무궤도 전차

‘특무’가 우리에게 소개하기를 평양의 교통문제는 4가지로 해결했다고 한다. 하나는 지하철, 둘째는 버스, 셋째는 궤도전차, 네 번째는 택시라고 한다. 그런데 앞의 3가지는 보았는데, 택시는 보지 못했다. 북한은 연료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주민들이 택시를 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 북한의 고급식당은 라이브 공연을 곁들이고 있다

북한은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가 아니다. 여행객을 접대하는 일도 질이 떨어진다. 만약 일시에 2천여 명이 북한을 관광한다고 하면 북한의 접대사업은 마비될 것이다. 좀 과장됐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랬다. 한 개 식당에 한번에 40명이 들어가니 접대질서가 엉망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렇지 않다. 그것도 식탁이 4개뿐인데도 말이다.

▲ 식당에 전자 피아노까지 구비되어 있다

가이드는 농담으로 식당 복무원을 가리키며 중국노래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을 불러달라고 할까?”라고 해 우리는 어린 여자애들을 놀리지 말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몇 명의 여자애들이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전자 피아노도 밀고 나왔다. 와! 얼마나 멋있게 부르는지… 노래를 잘 부를 뿐 아니라 자세도 배우 못지 않았다. 나는 가이드에게 “이 여자들은 배우인가, 아니면 복무원인가” 물었다. 가이드는 북한의 식당들은 모두 그렇다며 복무원들은 노래 부르라고 하면 노래를 부르고, 예술적 수준이 아주 높다고 한다. 사실 그들의 식당은 노래를 곁들여서 하는 것이다.

▲ 두 아가씨의 노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노래 반주기는 없고, 전자 피아노로 반주한다. 그 중 한 여자에게 노래를 청했다. 노래가 고조에 이르자, 아주 풍류스럽게 춤을 춘다. 요리가 상에 오르자, 음식을 나르던 몇 명의 복무원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몇 명의 복무원 아가씨들이 아주 귀여웠다. 몇 곡 부르더니, 지원군(중공군)노래도 불렀다.

가사가 조금 틀렸지만 타국에서 고국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아주 새로웠다.

여러 명이 마이크를 바꾸어 쥐더니, 또 중국노래를 불렀다. 그 중 ‘五星红旗(오성홍기)’는 큰 박수를 받았다. 외국에서 ‘五星红旗 ‘를 들으니 감정이 이상했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 북한의 가라오케에는 한국노래도 많다고 한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중국의 유행가를 부를 줄 안다는 것이다. 나중에 부른 두 곡의 중국노래를 나는 듣지 못했다. 젊은 여행객들은 노래를 들으며 연방 재청했다. 그러나 비교해보면 나는 북한방문 첫날 만났던 그 아가씨(묘향산호텔 아가씨)가 더 고상해 보였다.

그는 전형적인 북한미인이었지만, 여기 아가씨들은 현대가수처럼 몸을 흔들고, 튕기기도 했다. 훗날 나는 북한의 가라오케에는 한국노래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북한이 통제를 엄격하게 하지만, 문화예술의 전파에서는 한때 중국의 좌경적 통제보다는 나은 것 같다.

북한의 식당에는 여러 악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희귀한 전자 피아노도 있다. 이 식당의 전자 피아노는 아주 고급이다. 장구도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기악으로 반주했다.

반주든, 공연이든 모두 다 할 줄 아는 전문예술인 같았다. 중국에 있었더라면 이 여자애들은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지 않고, 베이징에서 이름을 날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국가급 예술단체 단장의 말이 생각났는데 “세계의 많은 국가를 다녀보았는데, 북한의 예술소질과 기초는 아주 훌륭하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는 대형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을 보았는데, 그의 말을 검증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은 북한의 교육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민족은 본래 가무(歌舞)에 전통적인 문화가 있는 민족이다. 북한의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엄격한 문화훈련을 받는다.

다시 말해 북한은 폐쇄국가이지만, 비교적 양호한 민족적 예술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과 다르다. 비록 같은 민족이지만, 한국의 민족예술 전통은 순수하지 못하고 서구화가 심각하다.

저녁밥을 먹은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황해남도 사리원시에 갔다. 사리원시는 우리나라의 성(省) 소재지에 해당하는 곳인데, 야경은 아주 고요하고, 전기가 없어 전 도시가 새까맣다. 아침 출근시간은 비교적 활력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괴괴했다. 우리는 사리원 정부가 제공한 초대소에 묵었는데, 규모는 크지 않고 아늑하고, 위생이 괜찮았다.

시설이 아주 좋다는 묘향산 호텔보다 느낌이 좋았고, TV 신호도 끊기지 않았는데, 다만 수도물이 시간제였다. 위생실에는 낮에 물을 받았다가 밤에 이용할 수 있도록 큰 플라스틱 통이 구비되어 있었다.

▲ 사리원 초대소

아침밥을 먹고 우리는 판문점으로 떠났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가는데 가는 도중 군용지프차 2대를 본 것 외에 다른 차를 보지 못했다. 군용지프차는 구 소련제인 ‘와야'(УАЗ: 소련제 지프차)였다. 38선에 도착하기 전에 수속을 했는데, 여기는 군사통제구역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쐴겸 넓은 도로에 나섰다. 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도로 가운데 앉아 있는데, 조금 있으니 지프차 한대가 달려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키려는데, 갑자기 지프차에서 경적소리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온다. 너무 놀라 도로 밑으로 도망하자, 일행은 모두 웃어댔다. 동료들은 지프차가 그렇게 경음기를 울려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에 38선 이남은 남한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전쟁 이후 북한이 경계선을 군사분계선 쪽으로 밀고 나가 설정했다고 한다. 38선 이남의 개성이 훗날 북한에 속하게 된 것이다.

▲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

좌측은 북한군 대표의 자리이고, 우측은 미국 대표의 좌석이다. 해설하는 북한군 군관(장교)을 찍고 싶었는데, 찍지 못하게 했다. 해설이 끝난 다음 나는 빈 책상만 찍었다. 북한 군관이 해설하면 김 가이드가 통역했다. 불쾌한 것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에 대해서는 딱 한마디만 한 것이었다. “중국도 우수한 아들 딸들을 조선전쟁에 내보냈다”고 하고, 좌측 북한군 대표 자리를 가리키며 “이것은 당시 조선인민군 남일 장군의 자리이고, 이것은 중국대표의 자리다”고 말하고 말았다. 감정이 좀 이상했다.

▲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던 당시 회담장

이것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장소다. 맨 안쪽은 미국대표의 의자이고, 바깥은 북한대표의 의자이다. 해설을 들으니 이 조인장에는 당시 천막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미국은 어떤 증명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사코 이 천막에서 협정사인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협정 사인을 마친 후에 천막을 찢어 버리고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일성 동지의 영도 아래 불과 7일만에 이 집(판문점)을 짓고, 미국의 음모를 분쇄했다”는 것이다.

판문점에서 정전 회담장까지는 실제 군사분계선이다. 그러나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우리는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실제의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장소를 볼 수 있다.

▲ ‘조국통일친필비’

군관은 우리를 데리고 비문을 하나 보여주었다. 김일성의 친필서명이 있었다. 그 위의 작은 글자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에 비준한 문건인데, 아래 작은 글자가 실제 비준한 문건이다. 볼 수는 있지만, 계단으로 올라갈 수 없으며,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

▲ 회의장을 가로지른 분리선

▲ 멀리 보이는 것이 ‘남조선’과 미군측 건물

분리선 말뚝은 도로표시 같은 콘크리트 말뚝이었는데, 그 말뚝의 저쪽은 한국이다. 북한사람들은 한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남조선’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군사분계선과 아주 가까웠는데. 거리가 1백 미터가 안 되었고, 한국 쪽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북한 쪽에는 위병소가 있다.

한참 보니 사진 찍기도 어려웠다. 가이드는 우리를 데리고 건물 위의 발코니에서 전경을 보여주었다. 올라와 보니 북한 쪽에 많은 초병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 보니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병사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물에 오르자 병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 대적하고 있는 북한군과 미군측, 분위기가 아주 냉랭하다

이전에 외국 관광객이 여러번 군사분리선에서 끌려간 사례가 있어서 통제가 심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어느 한국 여대생(임수경 지칭-편집자)이 깃발을 들고, 통일구호를 외치며 분리선을 넘어간 적이 있는 바로 그 선이다. 만약 외국 여행객들 중에 그런 발생하면 처리하기 어렵고, 한국 쪽에서는 일단 선을 넘는 사람이 있으면 경고 없이 총을 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쪽 건물과 전경을 대강은 볼 수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아주 잘 지은 큰 건물(‘평화의 집’ 지칭-편집자)이 하나 있었다. 아마 북한쪽 건물(판문각)과 같은 용도로 상응하게 지은 것 같았다. 분계선상에 한 줄로 5개의 작은 집(콘센트 건물)이 있는데, 양쪽의 두 집은 미군이 관리하며, 중간에 3개 집은 북한군이 관리한다고 한다. 평소에 미군과 접촉하고 교섭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 아주 멀리서 줌(ZOOM)을 당겨 찍어 화질이 안좋다

갑자기 한국 쪽에서 군복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나왔는데, 한 명은 사복군인이었고, 한 명은 확성기를 들고 우리를 향해 큰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한 명은 영어로, 한 명은 조선말로 통역했다. 한마디만 하고 고장이 났는지, 두 사람은 확성기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들어갔다.

▲ 대동강위에 떠있는 ‘푸에블로’호

점심밥을 먹고 평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본 것은 ‘미국 간첩선’ 푸에플로호였다. 이 간첩선은 북한의 동부 원산부근에서 정탐행위를 하다 북한군에 의해 나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처음에 미군이 불복해 북한해군이 총을 쏴 미군 수명이 죽고, 82명을 생포했다. 이 사건은 68년에 발생했는데, 현재 배는 공개 전시되고 있었다. 배 위에는 기록사진들과 테이프가 있었다. 우리에게 중국어판을 보여 주었다.

▲ 1866년 미제 침략선 ‘셔먼’호를 불살랐다고 선전하는 기념비

강 언덕에 오르자 하나의 비문이 있었다. 조선 글을 아는 친구가 내게 말하기를, 그 비문에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가 150년 전에 미국 침략선 ‘셔먼’호를 불살라버렸다며 썼다고 한다. 나는 이게 정말인지, 아닌지, 어리둥절했다.

북한은 연료가 아주 부족했다. 버스는 평상시 기름통이 모두 비었다. 차가 출발할 때 기름을 신청하고, 행선지를 선택한 다음 기름통에 기름을 넣고 떠난다. 주유소가 안 보인다. 듣자니 중국이 북한에 송유관을 통해 매년 공짜로 천만 톤(확실치 않다)의 원유를 보내준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기름값이 올라 지금은 오백만 톤만 보낸다고 한다. 공짜로 주는데도 기름은 여전히 곤란한 모양이다.

▲ 吉普車(길보차: 중국어로 지프차)

▲ 학생들이 이동하고 있다. 이동물체어서 화질이 안좋다

▲ 짐차에 사람이 타고 있다. 이전에 중국에 이런 현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 ‘3대 혁명’ 전투장

돌연 여기가 궁금했다. 친구에게 여기가 뭘 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한참 동안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럼 뭐라고 써있느냐고 물었더니 “3대혁명 전투장”이라고 씌어졌다고 한다.

▲ 평양에 도착해서 줄곧 여경찰을 찍으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다. 차 위에서 찍기가 정말 어려웠다

평양의 여자 교통경찰에 대해 말해보자. 이 사진의 여자가 진짜 경찰이다. 우리나라와 다르다. 평양의 여자 경찰들은 밤 10~11시까지 근무 위치에서 지휘했다. 우리는 밤에 산보를 한 적이 있는데, 도로변에서 어떤 남자가 여경찰이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나 남편쯤 되는 사람 같았다.

평양의 밤은 고요하다. 정말 여경찰이 도로 가운데에 서있다가 차에 치어도 모를 것 같았다. 나는 김 가이드에게 “만약 여경찰이 서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차 사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미소를 짓더니 “차에 전조등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만약 전조등이 고장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아, 경찰들의 지휘봉에 전깃불이 있지 않는가?”고 대꾸했다. (계속)

번역, 정리: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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