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주말의 명상 주제. 비극을 생각해 본다. 고통, 공포감, 털 깎이는 양들의 속수무책을 생각해 본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지경을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이 때 가장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 중의 고통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는 고립감이다. 전 세계 양심수를 돕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출발도 그래서, “세상은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자는 것이었다.


잡혀간 정치범 가장이 어디 있는지조차 가족들이 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은 한 평이 조금 넘는 감방을 맴돌면서 어린 아들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 놈들, 아비가 여기 있다.”자신이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기만 해도 그것으로 되겠다는 심정이었다.


중국 투먼 수용소엔 체포된 탈북동포들이 지옥으로 강제송환 될 날만 대기(당)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물론 불행 중 다행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알려지면 뭘 하나? 대한민국 헌법상 자국민인 그들의 죽음의 행진에 대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은 그것을 얼마나 ‘중요사항’으로 치부하는지, 하늘 보는 마음이 가벼울까? 아, 이 평온한 주말 아침의 미사, 예배, 법회가 그들을 얼마나 기억해 줄까?


지구상에는 미얀마의 카렌족, 러시아의 체첸족, 중국의 티베트인들, 유럽의 집시들처럼 오도 가도 못할 틈새에 갇혀 있는 소수 약자들이 있다. 말레지아의 어떤 수상(水上) 부족은 학대를 받는 건 아니지만 국적이 없어 합법적으로 상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만(韓滿) 국경 지대의 바로 우리 동포들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과연 일상적으로 알고나 있을까?


중화패권주의자들은 이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월경자(越境者)’라는 위법자 취급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난민에 인도적 난민(forced humanitarian refugee)을 합친, 어김없는 난민들이다. 송환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사람들이 난민 아니면 누가 난민이란 말인가?


아우성 쳐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세계의 인도적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북을 자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위선을 이겨내야 한다. “길거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업고 가지 않겠느냐?”는 차인표 이성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려는 종소리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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